1972년. 유럽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유럽이라니. 멀고 먼 지구 끝의 대륙이고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해서 여권을 받거나 비자를 받기도 힘들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모두 유럽이라고 부르지만 1970년대만 해도 유럽을 구라파(歐羅巴)로 불렀다. 나라도 아니고 대륙인데 마치 그 대륙 전체에 가는 듯 총칭 구라파에 간다고 할 정도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이 없었다. 정확하게 나라 이름을 물으면 그때서야 구라파의 덴마크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파리, 런던, 베를린도 아니고 첫 유럽 출장이 덴마크였다. 이렇게 먼먼 나라로 날아갈 줄 어디 알았겠는가. 직항은 당연히 없었으므로 일본에 들러서 일본 대원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북극을 넘어갔다. 흔히 들어본 나라도 아니고 혼자 여행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 걸스카우트 대원들과 지도자를 이끌고 초행길을 떠나야 했다. 책임감의 무게는 톤으로 재어도 모자랐다.
1970년에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국제 캠프를 열었던 경험도 있고 해서 덴마크에서는 국제 캠프를 어떻게 진행하는가도 궁금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해외와는 우편으로 교류하고 업무를 보던 때였다. 국제 캠프가 개최되니 참가하라는 서류가 유럽 덴마크로부터 안국동 사무실에 도달했다. 1972년이면 힘없고 보잘것없는 극동 끄트머리에 위치한 우리나라에까지 참석하라는 편지가 왔고, ‘우리도 한번 가보자’고 용기를 냈다. 나이 마흔을 넘겼지만 장기 해외 출장을 앞두고 반걸음이라도 내딛는 데 도움될 만한 이전의 경험은 하나도 없었다. 매 순간이 첫 경험으로 기록되었다. 세세하게 어제 일처럼 예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새로운 것을 참으로 많이 배웠다. 업무적으로는 이런저런 것도 우리나라 청소년 활동에 적용해봐야지 하는 생각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집에 가서 우리 아이들에게 외국의 새로운 것들, 신기한 먹거리, 생활 방식, 사람들의 행동 양식 등을 이야기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탄 대형 버스가 무척 큰 배 안으로 들어가서 바다를 건넜던 건 아직도 4D의 느낌으로 생생히 기억난다. 그게 가장 충격적이었나 보다. 한 달여 동안 유럽의 덴마크, 스위스, 영국을 거쳐 미국을 지나 일본을 통과해 서울로 돌아오면서 대원들을 이끌고 각 방문지의 걸스카우트 연맹을 방문했다. 서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들어왔으니 비행기로는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이후부터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 캠프 등에 참가하느라 비행기도 참으로 많이 타고 다녔다. 창신동 약동이었던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펼쳐졌다.
이렇게 시작한 재취업은 12년 동안 지속되었다. 과정과 결과가 어찌 될지 미리 점칠 수는 없었지만 목표를 세운 대로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걸스카우트 연맹에서도 매진하여 일했다. 월급쟁이로 총 29년을 일했고 쉰 나이를 넘어섰으니 그 정도면 많이 일했다고 생각한 1980년의 어느 날 실무에서 손을 놓기로 결심했다. 52세까지 초고속으로 달려가는 화차에 석탄을 끊임없이 삽으로 퍼 넣듯 달려왔다. 쾌속열차처럼 달려가던 회사 생활도 나의 결단에 의해 멈추었다. 노인 세대에 끼기에는 젊었고 젊은이들 근처에 가기에는 늙수그레한 쉰셋 나이 이후에 오는 삶은 무엇일까. 답은 아무 데도 없었다. 아직 노년으로 분류될 수 없는 삶의 형태가 어찌 될지는 나도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일단 50세 초반 이후의 휴지기 단계로 넘어갔다. 조금 침잠하며 기다리면 무언가가 다가올 것이고 나는 그런 삶, 바빠서 동동 뛰는 삶이 아닌 인생의 하구(河口)를 향해 잔잔히 흐르는 강물 같은 삶을 맞고자 했다. 우선 휴식과 여유를 갖고 싶었다. 일단 계획을 크게 세우지 않았다. 소소한 ‘일’들이 따라왔다. 53세에 걸스카우트에서 은퇴하고 이사, 명예이사로 지금까지 ‘도우미’ 활동을 하고 있다. 매달 정해진 날에 월급을 받는 달콤함도 있지만 월급을 받으며 더 일하겠다고 하는 것도 욕심일 수 있다. 내려놓을 때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나이 든 후에는, 필요하다면 경험에서 비롯된 노하우를 무보수로 나누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이 듦에 따라 사회를 위해 체력과 능력에 맞는 역할들이 주어지는 것, 주변에서 나를 아직도 필요로 한다는 것에 또한 감사했다. 91세를 맞는 올해 그러한 봉사의 모든 ‘업’을 내려놓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농구인 동우회, 걸스카우트 삼엽회, 장학재단 등 이사나 고문 등으로 활동했던 모든 직함을 내려놓으며 올해의 회의에 마지막으로 참여하겠음을 밝혔다. 인생 한 편이 일단락 맺어지는 느낌이다.
은퇴한 이후 함께 살면서 실질적으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남편과 국내로 해외로 여행도 다니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남편은 젊은 시절에 애 많이 썼다고 가는 도시마다 내게 선물을 했다. 과묵하고 무뚝뚝하여 그런 로맨틱한 면이 어디 있겠나 싶었는데 이런 깜짝쇼를 벌이기도 해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아무 때나 큰 선물을 하는 부모는 아닌데 여행 중에 성인이 된 다 큰 아이들을 생각하며 기념이 되는 선물을 구입하기도 했다. 며늘아기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것들을 좋아하여 남편은 특히 더 신경 쓰며 귀여운 것을 찾아다녔다.
이국의 타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젊었을 때나 일흔이 넘었을 때나 흥미롭고 생경하게 다가왔다.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無)가 된 것은 아니다. 내 안 어딘가에 쌓이며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왔으리라 생각한다. 서른, 마흔 나이 때에는 굵직굵직한 변화를 맛보았다. 환갑, 고희를 넘어서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는 깨달음이 생겼고 자잘한 변화들이 무의식 중에 나의 사고를 움직였다. 대학 1학년, 2학년 시절, 사회 초년병 시절에는 마흔, 쉰의 나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했다. 하루하루 헤쳐가고 쌓아가는 사이에 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누구와도 다른 내가 되어갔다. 꿈같은 한마당, 봄날의 나비처럼 시간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