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예정의 세상 여행 중 모녀의 두 번째 여행지 하노이
하노이에 도착했다. 베트남 여정은 북부의 하노이에서 출발하여 중부 도시들을 거쳐 남쪽의 호찌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장도에 앞서 나흘의 홍콩 체류는 본격 여행에 앞선 워밍업을 대신했다. 이제 본격적인 장기 여행 마라톤에 돌입하는 기분이다. 약간 상기되었다. ‘아이와 함께 두 여인이 안전하게 이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라는 생각이 줄곧 머리 한 구석을 떠나지 않는다.
홍콩과 한 시간의 시차를 두는 하노이의 15시 40분.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천천히 공항을 나서도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각이다. 일단 안심이 되었다. 도착지의 도착 시간에 해가 떠있고 아니고는 우리의 여행 패턴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기준은 해의 유무이고, 유사시에 어떠한 대응을 하기 위해서라도 방문할 모든 도시에 도착하는 시간과 떠나는 시간을 낮 시간대에 맞추기로 했다.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은 일본과의 합작 건설로 2014년 문을 열어 깔끔했다. 올해 지은 듯 새 건물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시야에 들어오는 이미지의 색상 차이에 둔감하다면 인천 공항의 일부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그 무엇에도 저항할 수 없는 이국의 공간에 오도카니 서 있게 되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 놓였고 나의 양 어깨는 경직되었다. 귀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소리와 활자의 낯섦은 뜨개질 코 하나를 빠트리고 짠 털목도리처럼 마음을 긁어댔다. 나는 베트남 땅에 발을 처음 디뎠고, 아이는 대학 시절에 헤비타트 봉사 활동을 하러 남쪽 호찌민 시 인근에 온 적이 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에 가려면 1,600-1,700킬로미터 이상(구글 맵에 따르면) 차로 달려야 한다. 도시 간 지리, 기후, 문화가 확연히 다를 터인데도 호찌민에서 했던 봉사 활동의 기억이 좋았던지 아이는 나보다 새로운 나라, 도시, 음식, 문화에 대한 경계심이 덜했다. 다만 이국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불안지수가 급상승하여 옆에 있는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하노이로 향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인터넷의 커뮤니티에서 읽은 무수한 여행 경험담과 댓글의 영향이 컸다. 비단 하노이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우리가 거쳐갈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의 일부 도시에서도 겪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경험들이다. 좋은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아이는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내 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이 내용들은 ‘악플’, 혹은 ‘가짜 뉴스’에 포함될 것이다. 그 내용이 어찌나 부정적이던지 소리가 닿는 귓바퀴를 포함한 한쪽 볼이 검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지구 상 어느 도시에 악행을 범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만은 막상 들어보면 여행에 대한 안 좋은 댓글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몰이해와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하다. 아이는 두려움의 자가 퇴치법 삼아 계속 읊는 것일 텐데 그냥 두었다가는 나의 얼굴 반쪽이 시커멓게 상할 것만 같아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 긴 마라톤을 조용히 순탄하게 그리고 즐겁게 이어가자면 첫 시작부터 삐그덕거리는 ‘소음’을 방지하고 해소해 나가야 했다.
세상은 생각처럼 그렇게 부정적 결과물이 들끓는 온상이 아니며 선한 일반인들도 무수히 있다고 설명을 했지만 공항을 나서자마자 호객꾼들, 정직하지 못한 택시 운전사들, 날치기, 도둑 등이 우리를 둘러쌀 것이라고 써댄 악성 댓글에 맞서 홀로 ‘아니다’라고 강변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댓글의 위력은 경험치에 기댄 엄마의 설명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했다.
이번 여행을 진행하면서 우리의 시도, 도전조차 위협하는 모든 가짜 뉴스에서 우선 벗어나야 했다. 여행지와 관련된 객관적 기술記述 이외에 오로지 나의 경험과 관찰에 의지하기로 했다. 나 혼자의 여행이라면 이렇든 저렇든 혼자 결정하면 될 일이었지만 둘이 하는 여행이므로 두 사람에게 합당한 최선,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이가 스스로 깨달으며 매사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호텔에 차량을 보내달라고 미리 신청했다. 나의 이름을 적은 팻말을 들고 서있는 운전기사를 만나면 될 것이다. 출국장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니 환영객들 속에 우리를 부르는 작은 팻말이 섞여 있다 “택시?” “호텔?”이라 물으며 근접하는 호객꾼들이 즐비했다. 그들의 눈빛을 경계했다. 다양한 표현을 하는 눈빛은 때로 매우 공격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팔이라도 낚아챌 수 있게 심적으로 일정한 안전거리 이내로 들어오면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우리의 눈과 다른 모양, 다른 색상의 눈을 아주 가까이에서 눈 대 눈으로 마주하면 두려움이 급습한다. 20대라면 마구 부딪혀 나갔을 것이다. 나는 일일이 대꾸하고 협상할 정도의, 배낭을 짊어진 20대 초반의 여행자는 아니었다. 이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배낭, 패키지, 자동차 여행을 했던 경험이 쌓인 나는 50대이다.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왔다면 스스로 헤쳐나갔을 것이다. 지금은 옅으나 강한, 엄마라는 보호막이 버티고 있으니 쉽게 그 안에 안주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공항 로비의 모든 사람들을 홍해 가르듯 헤치고 ‘MRS. LEE’라고 쓴 종이 팻말을 향해 나아갔다. 인터넷 상의 모든 부정적 댓글이 가리키는 잠재적 ‘원흉’이라 할 사람들을 헤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는 미소를 띤 기사를 만났다.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차량을 요청하지 않겠지만 시작은 이랬다. 아이는 조금 안심하는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