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전 시공간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앙코르 와트에 가는 날이 되었다. 출장길에 단 하루 짬을 내서 앙코르 와트에 왔던 15년 전, 말로만 들었던 앙코르 와트의 규모와 심도深到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처음 듣는 밀림의 새소리 만을 들으며 앙코르 와트 앞에 섰었다. 수백 년 동안 커왔을 거대한 나무들이 건축물 돌 틈을 뚫고 나와 사원과 한 덩어리가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엄청난 유물과의 첫 대면, 첫 감동이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역사를 잘 알고 있다면 수많은 부조 속에서 크메르의 역사, 주변국과의 관계, 종교, 상징, 생활상 등 역사 속 다양한 진실을 파악하며 수수께끼 풀어가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미천한 관계로 당시에는 뒷걸음치며 돌아왔다. 오늘은 앙코르와트 방문에 겨우 이틀을 할애했다. 아이가 나흘간 심히 아팠던 관계로 걱정이 앞섰다.
동화책을 읽어 주거나 일터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해 주며 관련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던 아이의 어린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때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 탐험가가 도망간 코끼리를 찾아 뒤를 쫓다가 앙코르 와트를 발견하여 우리가 지금 이 거대한 사원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는 덩치는 커졌는데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낼 때는 다섯 살 배기로 심술을 부릴 때는 십 대로 보인다. 스물이 훨씬 넘었지만 성인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귀여운 아이와의 여행이다. 나는 어쩌면 이 여행 중에 여행지를, 앙코르 와트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아이를 주로 보고 있나 싶다. 여주인공 1인의 느리게 흐르는 장편 영화 한 편이다.
이 거대한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의 놀람은 내가 지금 경험하는 전율과 일맥상통하리라 싶다. 아무튼 나는 19세기 산업화 시대 이전에 인간의 손으로 창조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 거대하고 거창한 도시를 처음 만난 외지인의 감격, 감동을 조금이나마 아이와 나누고 싶었다.
‘황실 레지던스이며 사원’, ‘사원의 도시’라는 뜻의 ‘앙코르 와트’는 1113년부터 시작하여 1150년에 건축을 마쳤다. 한반도에서는 인종이 왕위에 있던 고려시대였다. 이 지역의 여러 사원 중 앙코르 와트 하나만이 서쪽을 향하고 있다. 크메르 제국의 태양왕 격인 ‘수르야 바르마 II왕’의 영묘靈廟로 지었다는 설, 서쪽 영토의 지배자인 힌두의 신 ‘비슈누’와 왕을 동일시하고자 했으므로 비슈누의 파라다이스로 다가가기를 꿈꿨으므로 서향을 택했다는 설이 있다. 비슈누에게 바친 이 사원은 크메르 제국이 불교화되면서 15, 16세기까지 불교승이 사용하게 되어 부처의 상이 추가된다. 왕의 영원을 기원하며 불변하고 대를 이어 지속 유지되는 소재인 사암으로 지어졌는데 조각을 정교하게 할 수 있는 이 돌은 20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쿨렌Kulen’ 산으로부터 가져왔다. 어떻게 이동시켰을까. 이곳의 사원들에 사용된 사암의 양이라면 우공寓公이 그러했듯이 거대한 산 하나 정도는 옮겨왔을 것만 같다.
방문객들이 돌멩이를 쌓아 올린 돌탑에 작은 돌 하나를 얹고 돌아섰다. 아이도 따라 했는데 간절히 바랄 것이 뭐가 있는지 한참을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나는 옆에서 머쓱하니 기다렸다. 설마 ‘취직 잘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을까? 아이가 커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은 점점 많아졌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엄마라서 가장 잘 알 수도 있지만 가장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커가는 것이고 나는 나의 ‘올드 타운’에 머무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했는지 묻지는 않았다.
세월의 풍상으로 거의 사라져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앙코르 와트의 돌 건물의 색상을 상상했다.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벽은 흰색, 천장은 금색으로 칠해졌다고 연구자들은 판단한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화려함이다.
이 사원은 놀랍게도 의상을 걸치지 않고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1,832점이나 되는 여성 신상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조를 통해 머리 장식, 의상, 장신구, 손과 발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 등을 살펴볼 수 있는데 크메르 예술의 정밀도, 세련됨, 화려함의 극치를 진정 인간의 손으로 해낸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런 건축 예술품을 가능하게 한 당시 크메르 제국의 부와 권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상상하기조차 버겁다.
수리야바르만 1세는 크메르 제국을 현재 캄보디아 국토 면적(대한민국의 1.8배)보다 7배나 넓혔으며 태국, 말레이시아, 미얀마, 라오스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 와트를 남기고 크메르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14세 어린 소년이었을 때 왕인 큰아버지를 죽이고 쿠데타로 왕권을 잡았다. 정통성을 스스로 세우기 위해 힌두교의 신 비슈누를 숭상하는 ‘왕조의 사원’이자 자신의 묘지로 기능할 앙코르와트를 건설한다.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에는 불교 사원으로 사용되므로 크메르의 역사 문화, 힌두교, 불교의 문화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1864년, 베트남과 태국의 침략과 전쟁에 시달리던 크메르 제국의 후신 캄보디아는 프랑스 보호령을 스스로 요청하고 만다.
이 유적지 안을 걷다 보면 18세기, 16세기, 13세기의 역사 속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유럽의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 숨겨진 자연, 묻힌 유물을 찾아 나서는 데 두려움은 없었을까, 탐험가들의 시선으로 써내려 간 여행기를 읽으며 숲 속에 나타난 거대한 돌 건축물을 갑자기 발견하였을 때의 감동은 어땠을지 알고 싶다. 별 후원도 없이 탐험을 했던 1861년 세 번째 원정 길에서 라오스 탐험 중 탐험가 앙리 무오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풍토병이었을 고열로 사망한다.
앙리 무오가 남긴 연재물의 발췌문 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여간 재미나지가 않다. 야만적인 미지의 세상, 가장 뒤처진 나라 중 하나에서 이런 발견이 그에게 얼마나 경이롭게 다가왔을지… 읽은 내용의 일부는 얼추 이러하다. ‘먼지와 고운 모래의 두께가 깊어 푹신한 침대만 같던 숲 속 오솔길을 걸은 지 세 시간이 지나 갑자기 우리는 평평하고 큼직한 돌판이 깔린 넓디넓은 테라스와 마주쳤다. 테라스의 네 귀퉁이에는 두 마리의 사자상이 있었다. …… 우리는 하루 종일 이 지역을 걸어 다녔고 ‘엑스타즈’가 최고조로 상승하는 상태에서 경이에서 경이로 넘어 다녔다. 문인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이나 라마르틴Lamartine의 펜이나 클로드 로랜Claude Laurrain의 붓을 물려받지 않았으니 이 아름다운 예술, 이 폐허의 유물이 얼마다 장엄한지 예술을 하는 친구들에게 어찌 알릴 수 있을까…’라고 적었다. 사라진 문명, 머나먼 땅, 이국적인 것, 미지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것, 예술에 대한 탐험가의 안목과 설렘이 고스란히 다가오는 글이다.
이러한 탐험 정신과 기록이 아마도 20세기의 청년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까지 이어져 그가 탐험에 나서고 유물을 몰래 훔쳐 나오다 적발되어 투옥되는 진한 경험을 하게 되었나 싶다. 책을 통한 간접 체험이나 실제 탐험에 나선 직접 체험으로부터 얻게 되는 ‘엑스타즈’는 쉽게 벗어나기 힘든가 싶다. 나 역시도. 앙리 무오의 표현에 빠져들어 아이에게 전했더니 무덤덤하다. 엄마의 말에 귀 기울여 몰입해서 듣던 시절은 다 지나갔나 보다.
리조트 이름으로 더 익숙한 거대한 ‘반얀트리(벵갈 보리수, 스펑나무)’나무가 집어삼킨 사원과 마주 섰다. 나무의 줄기와 몸체는 사원의 돌 틈 이곳저곳으로 뚫고 나와 건축물과 거대한 나무는 한 몸이 되었다. 나무 밑동은 부서진 건축물 잔해를 내리누르는 거친 표피의 늙은 코끼리 다리처럼 보였다. 나는 뭐라 뭐라 간단히 설명을 하다 옆을 보니 아이가 없다. 사원을 보랬더니 어느새 나의 등 뒤로 가서 비쩍 마른 어미 닭과 깜장 병아리들에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열심히 보고 있었다. 신비하고 기이한 이 유물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이 병아리라니…
우리는 앙코르 와트를 나와서 살갗을 태우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어, 앙리 무오가 숲길을 나와 만났던 것처럼 너른 ‘코끼리 테라스’에 도달했다. 왕은 그 테라스 위에서 축구장처럼 넓은 운동장에 늘어선 시민들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툼레이더’를 촬영했다는 ‘따프롬 Ta Prohm’ 사원으로 이동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의 영생을 위해지었다는 불교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은 큰 키의 나무들과 이어진 숲에서 부는 바람이 태양을 가려주었다. 15년 전에 왔을 때 이 길가에 전쟁과 지뢰의 피해자인 장애우 악단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나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새소리와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500년, 1000년을 뒤에 두고 시내로 향했다. 레스토랑의 메뉴에는 ‘크메르 스타일’이라고 적혀 있다. 서양식, 퓨전식을 건너뛰고 우리는 당연히 크메르 식을 선택했다. 낮에 앙코르 와트와 외곽으로 돌아다니던 모든 관광객들이 한데 집결한 듯 북적댔다. 식민시대에 들어온 유럽인 2세들이 시내의 신식 레스토랑과 카페를 장악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들어간 식당의 주인도 프랑스인이다. 우리는 11세기부터 21세기까지를 넘나들며 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