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인문학
학창 시절, 영어 단어장을 펴 들고 기계적으로 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Platform(플랫폼)'은 그저 기차나 버스를 기다리는 '정거장' 혹은 '승강장', 딱 그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시험지 빈칸을 채우기 위한, 제겐 딱 그만큼의 납작한 단어였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세상을 다시 보니, 이 단어가 가진 품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걸 깨닫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접속하는 포털 사이트도 플랫폼이고, 거대한 물류가 오가는 사회 시스템도 플랫폼이며, 주말마다 동네 어귀에서 열리는 소박한 벼룩시장조차도 물건과 사람이 만나는 플랫폼이더군요.
무언가와 무언가가 만나고, 그 위에서 새로운 가치가 피어나는 모든 토대. 그것이 바로 플랫폼의 본질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시야를 조금 더 넓혀 보았습니다. 문득, 제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감히 정의하건대, 국가도 하나의 거대한 플랫폼이다."
치안과 국방이라는 단단한 운영체제(OS) 위에서, 교육과 복지라는 애플리케이션을 구동하고, 국민이라는 사용자가 각자의 삶을 디자인해 나가는 곳. 만약 국가가 플랫폼이라면, 우리는 꽤 까다로운 '유료 회원(납세자)' 일지도 모릅니다. 비싼 구독료를 내는 만큼, 이 플랫폼이 버그 없이 안전하길, 알고리즘이 공정하길, 그리고 무엇보다 쾌적하게 작동하길 바라니까요.
하지만 요즘, 이 거대한 플랫폼의 서버 상태가 영 불안정해 보입니다.
어떤 관리자들은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기는커녕, 사용자가 원치 않는 악성 코드를 심거나 플랫폼 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쌓이도록 방치하기도 합니다. 마치 기차가 서지 않고 지나쳐버리는 '무정차 역'처럼, 국민의 목소리를 패싱(Passing) 해버리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플랫폼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접속 오류가 반복될 때마다 저도 사람인지라 '로그아웃' 버튼을 찾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이 플랫폼을 떠날 수 없습니다. 바로 제 '아이들' 때문입니다.
이 계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할 내 아이들에게, 온갖 버그와 쓰레기 데이터로 가득 찬 엉망진창인 서버를 물려줄 수는 없으니까요.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망가진 플랫폼에서 아이들이 "여긴 접속하기 싫어"라며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글을 씁니다. 이것은 일종의 '버그 리포트(Bug Report)'입니다.
기왕이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플랫폼이, 접속할 때마다 에러가 나는 곳이 아니라, 머물수록 즐겁고 새로운 기회가 연결되는 '매력적인 정거장'으로 업데이트되길 바라는 마음. 그 소박하지만 단호한 바람을 담아,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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