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섯 살에,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십 분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병설 유치원이었는데 시골에서는 그리 대단한 거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걷는 일이 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린 나는 다리가 아팠고, 꾀를 하나 생각해 냈다. 할머니의 사랑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할머니 나 은행나무까지만 엎어다 줘.”
“그려.”
할머니는 기꺼이 굽은 등위로 손자를 업었다. 오 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는 은행나무에 이르러서야 나를 내려줬다.
“할머니 구판장까지만 데려다줘.”
“아이고 이놈아, 할머니 힘들어.”
하지만 결국 할머니는 또 손자의 꾀에 넘어가셨다. 오 분은 더 가야 하는 거리였다.
나에게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건 할머니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 나지 않았어도 할머니의 말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의 사랑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미워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엄마에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다. 그때부터 할머니를 사랑하는 손자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랑이 컸던 만큼 충격과 실망도 컸다. 손자에겐 언제나 사랑스러운 할머니는 왜 엄마에겐 폭력적인 시어머니였던 것일까? 한 사람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겐 한없이 못되게 굴 수 있었을까?
엄마가 아들에게 할머니의 뒷이야기를 들려주게 된 배경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엄마에게 또박또박 말대꾸하던 때이다. 나는 짜증 내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고, 할머니를 미워하는 엄마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가 이상한 사람이고, 엄마만 차분하고 괜찮아지면 문제가 없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엄마가 얼마나 많은 짐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삼키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철없는 아들에게 비수를 맞게 된 엄마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아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스물셋의 나이에 시집와 스물넷에 나를 낳았다. 진통이 시작되고 구급차가 도착했지만,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산모를 데리고 비포장 길을 달리는 일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내가 우량아였다는 사실이었다. 4.3kg의 무게의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는 일은 지옥이었다. 목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그 고통을 이겨내고 나를 낳았을 때 엄마는 모든 기력을 소진했고 일어설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 간신히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할머니의 첫마디는 “걸을 수 있으면 인제 일 해야지.”였다.
할머니를 변호해 보자면 할머니 또한 그런 인생을 사셨다고 말하게 된다. 아이를 낳은 그다음 날부터 밭으로 나갔다. 어떻게 그토록 비인간적이고 잔인할 수 있었을까?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와 엄마 모두 나에게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사랑 뒷면에는 어린 손자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들에게 가족의 민낯을 보여주기로 한 엄마의 결심은 아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을 보며 이겨낸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자식마저 꼴 보기 싫어진다면 도저히 버틸 힘이 없었을 것이다. 엄마에 대한 아들의 사랑보다 아들을 더 뜨겁게 사랑함이 그 힘든 시간을 버티게 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열어준 판도라의 상자로 인해 나는 방황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착한 아이였지만 속으로는 혼란스러운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뒷모습을 알게 된 그 시점부터 나는 자라기 시작했던 것 같다. 표면적인 모습만 봐서는 그 누구도 깊이 사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한 엄마의 결심은 아들을 위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