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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ㄷㅣㅁ Jul 23. 2024

07. 못난이 첫째 일기 0723

내가 요리를 하는 이유 2_김지연 씨, 조금만 기다려줘요


지난주 잠깐이지만 할머니댁에서 지냈다.

갓난쟁이였을 때 할머니 손에 자라서 내게는 엄마아빠만큼 소중한 존재지만,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통 찾아뵙지 못했었다.


키운 덕

우리 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정말 좋다. 친척들이 모이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할머니 손을 담갔던 물을 팔아야 한다고, 손맛을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좋은 재료, 깨끗한 주방, 정성에 대한 자부심이 깃든 할머니의 요리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늘 한결같다. 늘 그날 사용할 재료를 집 근처 시장에서 가장 좋은 놈(?)으로 골라다가 요리하니 재료 본연의 신선함이 느껴진다. 게다가 제철과일, 채소, 생선을 사용해 계절과도 어우러진다.



할머니는 요즘엔 요리를 통 하지 않으신다.

몸도 힘들고, 이전만큼 맛도 없다고 하신다(물론 어디까지나 할머니 본인 기준이다.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고급 요리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래서 이번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서툴지만 내가 할머니를 대신해 할머니 자리에 서서 요리를 했다.

사실 할머니댁에 오기 전, 명절에 설거지라도 좀 하려고 하면 귀한 손녀 손에 물 묻힐까 기겁을 하셨던 예전 할머니 모습이 떠올라 괜히 가서 요리한다고 설치다가 혼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런데 기꺼이 주방을 내주시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이젠 정말 힘이 많이 드시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린다. 할머니 기준에 이제 나는 부엌에 지분을 가질 수 있는 어른이 된 거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도마 앞에 섰다.


손녀딸이 칼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는

'이제 정말 다 늙어서 손녀한테 밥이나 얻어먹고....'라며 서운한 말씀을 하신다.

'아니! 키워놨으면 덕 좀 봐야지 할머니! 여태 해 먹였는데 언제까지 해먹이려고!'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려본다.


혹시나 소화가 안되시지는 않을까,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지 걱정 반, 요리대가인 우리 할머니가 인정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설렘 반 밥을 차린다.



김지연 씨,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함께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누구보다 할머니를 사랑한다 자부하고 있었지만,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만나더라도 얘기는 언제나 내 위주로 돌아가느라 듣지 못했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무지할 수 있었는지, 나는 할머니를 제대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출판업을 하셨던 나의 외증조할아버지는 새하얀 얼굴에 늘씬한 키를 가진 멋쟁이셨다고 한다. 아주 잘생긴 경성보이 느낌이었다고 할까. 얼굴에 맞게 안목도 아주 세련된 분이셨다고 했다.

그 덕분에 유복한 집 첫째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딸이었음에도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고, 가곡과 영화를 즐길 줄 아는 멋쟁이 신여성으로 살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만주에서 잠깐 살았었던 할머니 가족은 일본천황의 항복을 라디오로 들으며 서울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다행히 온 가족이 무사히 살아남아 다시 한번 삶의 터전을 다지고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꿈 많고, 공부도 잘했던 야무진 첫째 딸은 대학을 가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를 하다 첫눈이 내리는 광화문 국립도서관 앞을 산책하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시집을 외기도 했고, 멋쟁이 여대생이 되어 미니스커트도 입고, 도서관에서 책 읽는 미래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사업이 망하게 되며 그녀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장녀로서 식구들을 위해 기꺼이 꿈을 뒤로하고입을 덜기 위해 시집을 갔다. 자식을 낳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렵게 세 남매를 공부시켰다. 함께 교정을 거닐던 친구들이 그녀가 그리던 멋쟁이 여대생이 되어 공부를 하고, 한껏 멋을 부리는 동안 혼자만 다른 세상에 뚝하고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후 세 남매를 멋지게 키워냈지만, 장성한 자식들이 그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을 대신해 이미 망가진 몸으로 갓난쟁이 손자손녀 넷을 그 품에서 키워냈다. 그동안 160cm를 넘겼던 그녀의 키는 어느새 쪼그라들었고, 뽀얀 백옥같던 피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팔과 다리는 퉁퉁 부어 이제는 붓기가 빠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십수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첫째 손녀가 차려준 밥상에 앉는다.




내가 고시를 하기 잘한 건지 가장 후회되는 순간들, 아니지, 내가 조금 더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가장 자책했던 순간들은 내가 나의 시간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시간도 함께 갉아먹고 있다는 걸 느낄 때였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시간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늘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날 기다려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 아니 바람이 있었다.


할머니 얘기를 들으며 우리 할머니 고생 참 많이 했다 싶다.

얼른 호강시켜드려야 하는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못난이 첫째 손녀는 할머니의 첫 번째 기도제목이다.

내가 얼른 제 몫을 해야 할머니 잠을 갉아먹는 걱정거리가 줄어들 텐데.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몸과 마음이 더 망가지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데.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되뇌지만, 이전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던 할머니의 공간에 서서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시간이 제발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우리 김지연 씨, 나의 할머니로, 우리 엄마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사느라 김지연 씨로 살아오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그녀의 삶을 되찾아드려야 하는데.

나의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도 자꾸만 할머니의 몸과 마음이 저물어가는 것만 같아 조급해진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나의 시계는 빠르게, 김지연 씨의 시계는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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