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다른 이름, 동행
친구 넷이 일 년 만에 모였다. 살이 빠졌네, 쪘네, 흰머리가 벌써 나네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늘 우리 이야기의 서론이 되는 ‘아가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가들은 우리들의 삶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빨리도 자라고, 이모저모 따져봐도 예쁘기만 하다. 중고등학교 때 만나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면서도 우리는 크게 달라진 것 하나 없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일 년 만 못 봐도 훌쩍 자라 그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친구들보다 일찍 결혼해 큰 애들 엄마인 나는 아가들을 기르는 친구들이 그 시절에 얼마나 힘들지 이해해주기보다는 아가들 예쁜 거 놓치지 말고 더 예뻐해 주라고 다그친다. 개구리 올챙잇 적 모른다더니… 뒷다리 하나 자랐다고 이해를 못 해주는 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어리석다. 무튼, 그 작고 소중한 아가들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그 형용할 수 없는 소중함 때문에 너무 기뻐 그러는지, 아니면 먹고 자고 아픈 것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인지, 내가 지금 직면한 문제들은 크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의 서론은 계속 길어지고, 우리는 그 긴 서론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본론이라고 말해도 될런 지 모르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자주 주변의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장례식, 병원, 또 엄마.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엄마 된 사람으로서 우리 엄마를 기억한다. 철없던 시절의(여전히 철은 없지만) 원망과 애증은 후회로 남고, 우리의 후회가 갚지 못한 은혜가 될까 두렵다. 우리의 엄마들은 자주 아프고, 자주 울지만, 그 아픔을 우리가 자주 보지 못하고, 눈 감을 때가 많다. 그리고 엄마가 된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의 엄마처럼 군다. 참 슬프지. 그렇지만, 난 친구들이 대견하고 멋있다. 힘든 나날을 불평 없이 뚜벅뚜벅 걷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엄마와 딸의 모습들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두려움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그들의 무게를 지고 걷는다. 그렇기에 나의 두려움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같이 눈물 흘린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야기한다. 철학도, 사유할 만한 책도 아니지만, 그 짧은 만남 속에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담긴다. 집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참 많이 배운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니, 좋은 친구들 뒀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다. 이러한 관계가 진정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I이고 E이고(MBTI 상의)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만나 에너지를 얻고, 배워 나가는 것. 그것이 관계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 혼자서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등불을 들고 서 있는 저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벅차오른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이 나의 터널 안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서로의 감정 안에 발을 살짝 담그다 그 온도 차에 화들짝 놀랄지라도, 발장구를 치며 같이 노는 것. 그렇게 관계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서로의 온도를 맞춰가는 것. 그것이 친구를 만나 기쁨에 벅찬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기쁨으로 몇 달은 행복하다. 몇 달은 혼자 걸을 수 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긴 터널이 서서히 지나간다. 출구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덜 무섭다. 덜 두렵다. ‘동행’ 하기 때문일까. 죽음을 먼저 겪건, 출산을 먼저 겪건 간에,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감싼다. 우리의 경험은 친구를 덮어줄 담요와 같은 것이 된다. 따뜻하다. 같이 함께 하는 기쁨. 친구들이 늘 곁에 있기에, 오늘도 힘을 낸다. 줄곧 함께 이길 바라며, 오늘도 다른 이름의 사랑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