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라는 표현의 기쁨

by 김소영

요즘 집에서 강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나는 소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다.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번역 시장도 기웃거리고, 숨고도 들락날락, 혹시 팔 것이 집에 있나 청소를 하며 당근 마켓도 수시로 드나든다. 주업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 작은 일감들은 어찌저찌 삶을 살아가게 하는 작은 원동력이자 기쁨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쁨도 잠시, 추석이 왔네? 가까운 시댁과 친정을 왔다 갔다 해도 많은 시간이 남을 것인데, 갑자기 소일거리가 뚝 끊겼다. ‘조카 용돈 벌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다, 당근에서 괜히 철 지난 전동 오토바이만 구매했다. 딸아이가 무척이나 갖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삼십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또 다른 위험물(?)을 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당근에서 오 만원에 득템을 하고 보니, 그 돈을 조카 용돈으로 주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1초 만에 들었다. 결론적으로 장당 이 만원 짜리 번역으로 며칠간 번 돈을 하루 만에 홀라당 써버렸다는 것이다.


부모가 되고 나서 참 슬프게도, 내 아이 것을 사면, 부모님에게 드릴 것을 줄이게 되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라고 자기 위로를 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일단은 남은 예산이 부모님께 돌아갈 것이었다. 봉투에 담기도 부끄러워, 아빠 호주머니에 쓱 넣어드리며, ‘올해는 아빠 드리고, 아빠가 엄마 반 줘야겠다’라고 우스꽝스러운 얘기를 건네니, ‘엄마, 없는 데서 얘기해야지!’라며 아빠도 맞받아쳤다. 그리고는 그 돈을 반으로 나눠, 그대로 우리 아들 딸 용돈을 주셨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얼마나 과거의 내가 싫어했을 행동인가. 주고 다시 돌려받는 식의 허례허식으로 느꼈던 젊은 날의 오해. 이제는 절대 섣불리 오고 가는 정을 허례허식 따위의 나쁜 말로 경솔히 쓰지 않지만, 여전히 불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잠깐 사이 나의 눈빛을 읽으셨을까. 아빠는 다시 같은 돈을 꺼내 내게 돌려주시며, 아빠는 받은 돈으로 준 게 아님을 굳건히 하셨다.

이 놈의 눈물샘은 뭐 아무 떼나 작동하는지 잠깐 사이 또 시동을 걸기에, ‘그럼, 엄마 줘야지~’하고 농담으로 받아쳤다. 엄마도 안 받긴 마찬가지어서, 괜히 상차림을 거드는 척을 해보았더니, 정말 이상하리 만큼 부드럽게 마음이 녹았다.


매번 같은 결말이긴 하지만, ‘오늘도 마음만 무겁게 와서, 두 손 무겁게 돌아가게 생겼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눈 깜짝할 세에 상이 차려졌다. 거의 제사 음식남은 것이 대부분이고, 고기만 구워서 놓았을 뿐이었는데, 빚진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아이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맛있다’를 연발했다. 큰 아이는‘9살 살면서, 최고로’라는 표현을 썼고, 작은 아이는 ‘고기가 너무 맛있으니, 우리 집에도 보내줘요 할매’라며, 집안 살림에도 보탬을 했다. 아빠는 정말 더 많이 받았다는 듯 최고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즘 아빠에게서 전에 보지 못한 얼굴을 참 많이 본다. 지친 모습과 애들이 예뻐 죽겠다는 표정 그 둘이 가장 생경하고 어색한데, ‘맛있다’는 맛 표현에 이토록 기뻐할 줄이야. 엄마를 옆으로 밀어내며, 굳이 굳이 고기를 굽겠다고 자처를 하더니, 예상대로 고깃 값을 값지게 받은 눈치였다. 게다가 ‘어릴 적에는 엄마 아빠가 고지식한 줄 알았는데, 동년배 중에 가장 개방 적인 거 같아. 우리 집에선 대화로 안 되는 건 없잖아. 남의 집 가보니, 세상에는 말로 안 되는 것들이 참 많더라고. 그래서 감사해’ 라며 한 듯 안 한 듯(소금 후추 한 꼬집만큼) 아빠 칭찬을 했더니, 나야말로 서른네 살 인생, 아빠의 최고 기쁜 표정을 본 것 같았다. 역시 음식은 맛보단 맛 표현이지.


늘 크고 작은 분쟁들로 가득했던 어린 날의 기억들이 6인용 식탁 앞에서 맛있게 버물어졌다. 밥상머리에서 대화로 화해를 이루는 꿈같은(?) 일을 달성하고,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다니. 앞으로 ‘10살, 11살… 최고 맛있다’를 연발할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간의 모든 어려움들이 오늘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도 살짝 받았다. 역시 말에도 약간의 MSG를 첨가한 느낌이 있지만, 오늘의 맛은 정말 행복의 맛이라고나 할까. 맛있다는 말 하나로 이런 기쁨을 가져다준 내 작은 미식가들에게 정말 고마웠다. 오늘만큼은 정말 가져온 것 없지만, 최고로 무겁게 집으로 돌아갈 것 같다. 다음엔 어떤 표현으로 또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할까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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