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요 며칠 위경련으로 고생을 했다. 전날 먹은 것이 탈이 난 모양인데, 그건 사실 순전히 ‘우리들의 블루스’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지지리도 복도 없는 할망이라고 부르는 극 중 할망들은 자식들을 바다에서 다 여의고도 바다에 기대어 산다.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듯 보이는 그 어쩔 수 없는 삶의 고통들은 현실보다 때론 더 현실적이라 더욱 슬프다. 그리고 내가 목놓아 울며, 결국 위경련까지 오게 된 장면은 사실 그리 슬픈 장면은 아니었다. 할망이 돌무덤을 무너뜨렸다. 길가에 치이던 돌도 주어 소원을 빌던 할망이 하늘도 무심하다고, 이 딴 게 신이냐고 목놓아 울지 않고, 그저 쌓아오던 돌무덤을 쳐버린다. 그리고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그 돌을 주어 쌓는다. 대사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다만, 비가 오는 것인지, 눈물이 앞을 가린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흠뻑 젖은 채로 할망은 그렇게 내내 길가에 서있었다.
남편은 무엇이 그렇게 슬퍼 우냐고 했다. 그렇게 슬피 울 일이냐고. 현실이 더 슬프다고. 저 할머니가 그렇게 불쌍하냐고.
너털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 저 이야기도, 저 할망도 현실보다 덜 슬퍼 운다고. 현실에 저보다 더 큰 고통이 너무 많고, 다들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고, 착한 사람들에게 그런 일들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아 운다고. 나는 웃다 울다 꼭 미친년 같았다. 한 밤 중에 그렇게 울었으니, 얼굴이 붓고, 장기도 붓고, 위경련까지 온 것이겠지.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다가 또 쓴웃음이 나왔다. 잘 슬퍼할 줄도 모르는 나를 참 어쩌면 좋을지, 내 몸은 이 정도 슬픔에도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데, 나는 앞으로 있을 숱한 슬픔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그 생각을 하니, 또 위가 아파왔다.
앓아누워 놓고, 뒷 이야기가 궁금했다. 할망이 그렇게 돌무덤을 무너뜨리고 나서, 결국은 하늘은 정말 무심하게도 할망을 버렸는지. 이 드라마는 정말 그토록 슬프게 현실적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드라마이니까 기적을 바라도 되는 것인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슬픈 현실도 기적이 일어나는 현실도 사실은 둘 다 현실이라는 것을. 그래서 였을까. 큰 기대를 하고 보지 않은 다음 편에서 작가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이는 그 어떤 기적보다 현실적이고 또 기적적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우리를 벤다. 그 칼날에 맞고, 쓰러지기를 여러 번이다. 때론 무뎌지고, 때론 전혀 무뎌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쉬지 않고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거나,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슬픈 변명들로 우리의 슬픈 나날을 견디며 산다. 참 지혜롭다. 참고 인내하며 나를 갉아먹는 인생 대신, 욕하며 탓하며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나를 용서하며 사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모든 이들 이사실은 그 어떤 드라마 주인공보다 주인공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시련에 맞서면서. 그렇게 기적을 바라면서. 또 그러다 기적을 만나면서 말이다.
내 몸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결코 슬프기만 한 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를 포함한 삶의 주인공들이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 희로애락이 전부 있는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임을. 영원히 슬픔만 있는 삶은 없다는 것을. 지금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인생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 간단한 사실을 몰라 그렇게 매번 고꾸라지고, 매번 울기를 반복하지만, 세상 사는 착한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잘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에도 기적 같은 나날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삶이 군데군데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기적을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