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모든 순간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면 많은 순간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살아남았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나에게 암이라는 경험은 젊은 날 겪을 수 있는 많은 경험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
‘완전관해입니다.’라고 말하던 의사의 입모양을 기억한다. 기특하다는 눈치였다. 아주 굵고 짧게 앓았다. 유리 같은 나의 멘탈과 나의 징징거림을 한 번도 받아준 적 없던 의사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음을 칭찬해 주었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나의 기억들은 대부분 감사하고, 살아 냄을 기특해하던 순간들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하는 많은 삶의 굴곡들은 지나고 나면 때론 아니 자주 감사한 순간들이 된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감사할 수도 있고, 그때를 이겨내게 했던 나 자신 혹은 주변이들에게 감사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간에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나를 살게 하던 순간들이었기에, 절대 가볍지 않은 것이다.
일기를 좀 써 둘 걸 그랬다. 기억에 남은 순간들 말고, 다치고, 아파서 잊고 싶던 순간들과 그저 지나가던 모든 순간들이 지금엔 감사일 것임이 분명하다.
미래에서 과거를 보듯이 현재를 살기로 했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먼 미래의 할머니가 된 나는 지금 아이의 저 투정들을 어여삐 여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남편과 다툴 때도, 먼 미래의 조금 더 큰 어른이 된 나는 이런 일로는 다투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을 때도, 삶의 많은 굴곡들을 살아낸 나는 지금의 내가 어리고, 귀엽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프지 않은 지금의 내가 아팠던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아팠던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내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넌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작은 일도 큰 일도 무던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치는 바람에도 부끄러워하고, 눈물짓던 어린 날을 뒤로하고, 거친 바람도 관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두건을 쓰며,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어쩔 수 없는 고난의 순간들을 언젠가 지나갈 순간들로 여기고 싶다. 그리고 미래에 ‘내가 말이야, 사막에서 모래 폭풍을 맞았는데…’하고 무용담처럼 멋지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꾸준히 궁금해하면서, 할머니의 마음으로 꾸준히 귀여워하면서, 잘 가꾸어 나가고 싶다.
오늘의 30대 어른이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