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스 트라이얼

2. 휴정

by 김소영

연우가 실려나간 후, 철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경기에서 KO를 당할 위기에 놓인 선수가 된 철진은 여태껏 쓴 적 없는 카드를 꺼냈다. 펄스 트라이얼에서는 디지털 문서의 조작이나 타임 슬립과 같은 여러 방법으로 재판을 무효화하거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재판이 시작된 이후 아무도 법정을 떠날 수 없었다. 다만, 법정 내에서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디지털 가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가드를 쓰는 사람은 판사들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쓸 시간이 없이 긴박하고 타이트하게 돌아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드를 쓰는 이는 누구보다 수상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판사들은 그들의 고귀한 얼굴을 가리고, 잠깐 낮잠을 자는 듯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사실 본인 이외에 알 길이 없었다. 철진은 그런 가드를 지금 쓰려고 했다. 철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데이터의 정리나, 상대방 변호사와의 심리전이 아니었다. 휴정이 이뤄지고 있는 이 짧은 시간에 그는 갑자기 찾아온 그의 패닉 어택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발작은 잠이 들게 하는 약을 먹어야만 진정되곤 했는데, 지금은 당연히 그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철진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가드를 치고, 꼴사납게 종이 백을 입에 갖다 댔다. 숨을 들이쉬고, 마시기를 여러 번 가드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휴정 시간이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침 범벅이 된 입을 닦아 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재판 중에 한 번 더 패닉이 온다면, 이번엔 철진의 당황한 표정이 SNS에 퍼져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변호사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격이었다. 당연히 이길 경기에서 참패한 변호사의 실수를 그냥 넘어가 줄 요즘 사람들이 아니었다. 철진은 진정제를 하나 삼키며, 가드를 치웠다. 가드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환호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본인의 등장과 함께 터진 함성에 당황한 철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으로 관중들을 진정시켰다. 본인은 냉정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관객 입장에선 당혹스러웠다. 그들이 환호를 보낸 건 혜진의 등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철진의 벌게진 얼굴이 또 한 번 캡처되어 나돌았다.


혜진은 휴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펄스 트라이얼에서 법정을 벗어날 수 없다는 법이 유일하게 예외로 적용되는 것이 동 시간의 벌어진 인명 사고였다. 연우가 쓰러지고, 혜진은 보호자 자격으로 법정을 벗어나야만 했다. 혜진은 철진에게 공격할 빌미를 준 것 같아 씁쓸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철진을 한 번은 속였지만, 두 번 속이긴 어려울 것이다. 한 방 먹은 철진은 절대 작은 흠도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혜진은 철진의 눈을 등지며, 법정으로 걸어 나갔다.


‘재판장님,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 이혜란 양은 2197년 7월 10일, 한국 시간 14시 23분과 30분 사이에 순간적으로 기절하였고, 이 사건을 입증해 줄 증거들은 그 1분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판사는 이의를 제기하려는 철진의 손짓을 부드럽게 제지하며, 혜진에게 말을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분명 성폭행이 이루어졌고, 피해자가 사건 전후를 전부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흔과 같은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점들로 인해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피해자 가족의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습니다. 청소년 상담 프로그래머였던 피의자의 직업적 특성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에 1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은폐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며, 피의자 고 허승덕 씨를 증인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법정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한편에선 환호를 또 다른 한편에선 야유를 보내는 모습이 흡사 야구 경기를 보는 듯했다. 부장 판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장 판사의 마른기침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고, 판사들 주위로 다시금 가드가 올라갔다. 이 가상 재판에서 가능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룰이 하나 더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르지 않는 것. 사실, 영혼을 부른 다기보다는, 살아생전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죽은 이를 데이터화하여 법정에 세우는 작업이었다. 일반 사람들도 그리워하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흔히 쓰는 방법이었지만, 법정 내에서 영혼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증거가 실제 재판에 사용되기라도 한다면, 국제적 파급 효과를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다. 판사 중 한 명이 가드를 내렸다. 아무래도 다른 판사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 채 스스로 나온 듯한 모양이었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그의 불그스름한 얼굴은 법정의 열기에 불을 집혔다. 꽤나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드를 내린 판사들은 증인 요청을 허했다.


이번에야말로 철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억측을 기반으로 한 불필요한 데이터라고 주장해봤지만, 판사들의 얼굴엔 어떤 결의 같은 일렁임이 있었다. 철진은 그의 데이터 백에서 죽어간 필요 없는 데이터들 중, 꺼졌다 켜진 데이터를 놓치지 않고 골라 잡았다. 쓰게 되리라 생각한 적 없는 데이터였다. 하지만 그는 꺼지려 했다 다시 켜진 데이터들의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중요하진 않지만, 사실인 데이터였다. 철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 이 데이터들을 변하면 안 되는 진실들로 새롭게 재창조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법정 중앙으로 걸어 나가며, ‘성폭력은 1분 안에 일어날 수 없다’라는 문구를 스크린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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