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고 싶어 쓰는 글- 굿바이 초딩

아무도 읽지 않았으면 하는 글

by 김소영
‘비가 많이 왔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2학년 초딩 일기


화려한 것을 좋아하셨던 우리 부모님은 레스토랑을 빌려 반 친구들 전부를 생일에 초대해 주셨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은 심히 들떠 기쁜 마음을 표정에서 감추기 힘들었다. 그 기뻐마지 않던 마음은 비와 함께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큰 레스토랑에 단 둘이 앉게 되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크게 상심하여 내 기분을 살폈지만, 어린 나는 더 비참해질 뿐이었다. 아주 뚜렷하게, 혼자 앉아 있는 내가 그려지는 걸 보면, 그날의 상심은 오래도록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게 된 것 같다. 그때부터였을까. 혼자되지 않는 것=인기가 많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얻을 수 있는 인기는 전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행동했다. 반장, 회장, 봉사활동, 각종 대회에서 상 모으기, 영재 활동, 무용, 합창….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열심히 내 한 몸 불살랐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안티(?)도 같이 얻었다.


가장 큰 일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그해도 어김없이 반장이었던 6학년 때 나는 출장 가신 선생님을 대신해 방과 후에 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짝꿍이었던 친구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마침 눈에 띄었던 단소와 리코더를 내 등에 휘둘렀다. 뼈가 부러 지진 않았지만, 여자 아이 등에 선명하게 남은 멍은 절대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요즘이었으면, 학폭위(학교폭력위원회)에 붙여졌을 일이지만, 그때는 그 아이의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끝났다. 맞은 것은 두고두고 억울했지만, 내가 끝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 짝꿍은 내 생일에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그 아이는 내가 그에게 유일한 친구였다고 했다. 반장으로서 모든 친구들을 되도록이면 ‘공정하게’ 대하려고 했던 태도가 그 친구에겐 친구의 애정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생일에 초대받지 못한 그 친구는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가 자신을 배신했고, 그때부터 나는 모든 원망을 받아 마땅한 애였던 것이다. 바닥에 나뒹굴던 단소와 리코더는 부서진 그 애 마음의 조각들이었다. 그렇게 조각난 마음에 대한 짐을 나는 끝내 같이 지지는 못했다. 등이 퍼렇게 되도록 맞은 것으로 죗값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려서 그랬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보아도, 상처로 남은 죄책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신나서 떠들다 보면 소외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많이 다르지 않은데, 그럴 때마다 그 아이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다. 화를 내거나, 우는 표정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표정. 그리고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얼굴에도 같은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 해 여름, 스스로에게 선고한 일종의 벌처럼 나는 학교 도서관 봉사에 자원했다. 막 신설된 도서관 바코드 작업을 아이들이 하는 아주 길고도 지지부진한 일이었는데, 좋아하는 책을 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것이 더 곤욕스러웠다. 그렇게 시작된 장장 두 달에 걸친 봉사활동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께서는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주셨다. 나야 스스로 벌을 준 거라지만, 다른 애들은 대체 왜 이 힘든 일을 자처했을까 잠깐 생각했었는데, 떡볶이 집에서 그 비밀이 밝혀졌다. 같은 반인 적 있었지만, 가깝지 않은 남자아이 둘은 나를 좋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할 말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좋아한다는 아이들에게 더 관심이 갔었지만, 사실 다른 한 명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로 남았다. B는(그 아이) 내가 어릴 적에(그보다 더 어릴 적에) 같이 어울려 다니던 인기 많은 애들과 함께 그 친구를 따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는 차 트렁크에 들어가라고 협박을 했다면서, 그래도 나는 옆에서 서있기만 했다며 그 사실이 기억나냐고 물었다. 떡볶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내가 그럴 리 없다는 말만 연신 하다 돌아왔다. 당시에는 정말 그런 기억이 나지 않았고, 지금도 B가 묘사했던 대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모를 기억만 남아있다.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인간은 현실을 부정하리만큼 자신이 싫어지면, 스스로 기억을 지울 수 있다. 그날 밤 이후로 트렁크에 갇혀 죽는 꿈을 아주 오래 여러 번 꾸었다. 새하얀 얼굴에 착하고 때 묻지 않은 미소를 가졌던 B의 이름을 나는 기억한다. 범인이 피해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이와 같을까. 매를 맞던, 그대로 서있었던 뭐든 간에 나는 죄인이었다. 일그러진 영웅 따위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저, 죄인.


그리고 그렇게 (죄인으로)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 나는 정말로 ‘평범’이라는 이름 뒤에 숨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살고 싶었다. 유달리도 길었던 그 해 여름에, 일요일이지만 학교를 갔던 그날, 그 길에서 나는 또 이상한 아저씨를 만났다. 나보다 길을 앞질러 가서 천 원씩을 떨어트려놓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나 보다가, 천 원을 줍자마자 내 손목을 낚아챈 아저씨는 운동장 뒤편으로 나를 끌고 가서 성폭행을 시도했다. 도망치던 내 뒤로 웃고 있던 아저씨의 얼굴을 몽타주로 그리면 지금이라도 당장 잡을 수 있을 정도이다. 당시에는 더 선명했을 얼굴인데도 그놈은 끝내 잡지 못했다. 경찰도, 우리 아빠도, 심지어 나조차도 잡을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남으로부터 나를 숨기고, 비로소 나로부터도 숨기는 고난도의 기술을 익히며 나의 초등학생 생활이 끝나갔다.

평생 상처로 남을지 모르고, 어쭙잖게 기술만 익혔던 나는 가치 있었던 대부분의 것들을 지우고, ‘시’ 하나만 남겼다. 시는 불쌍한 나에게 주는 애착 인형 같은 것이기에 다 빼앗지는 못했다. 나는 시로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목놓아 울고, 가끔 노을을 보며 죽고 싶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것 같은 나지만, 나는 졸업식에서 어미 잃은 새 마냥 오래 울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많이 울지 않았다. 세상에서 배울 대부분의 것들을 ‘그날들’에서 배웠기 때문일까. 나는 그때 나의 우주가 태어났고, 그 시절에 오래도록 갇힌 채, 사라진 것 같다. 얼마 전 쓴 시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아직도 모래가 휘날리는 운동장에서 무한대를 그리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한없이 우울한 나의 시절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의 글이 이 시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버려야 할 때에 버리지 못한 인형처럼, 무섭고 흉측하게 변해버린 슬픈 기억의 잔상들. 한 때는 새 것이고 예뻤던 내 시절을 떠올리려 애쓰며, 난 아직도 그 못난 것을 버리질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 작가님은 슬픈 것들에서 건져 올린 것을 쓰시면서도 그렇게나 멋지게 글을 쓰시던데, 나는 그 아픔이 지금의 나를 잡아먹는 것 같아서 이제 슬픈 것들과 작별하고 싶다. 그때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만, 그때의 나를 버리고, 지금의 나를 살고 싶다.

행복한 지금에 때때로, 혹은 아주 자주 방해가 되는 길어 올려진 우울은 이쯤이면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늘 쏟아내는 글을 피하려는 나는 오늘 스스로 쏟아내면서 성장하고 싶다. 정말이지,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글이지만,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내가 말하는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기에. 헤어지고 싶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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