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불행한 게 아니야

그러니 한번 해보자. 네 인생!

by 이생

문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다. 그 세계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오교도관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서 본 상담실은 꽤 아늑한 곳이었다. 우리 방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다양한 초록빛의 식물들이 많이 있었다. 벽지는 연한 파란색이었는데 내가 살던 방에서 한 번도 이런 색깔의 벽지로 둘러싸인 적이 없었다. 내 마음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푸릇한 기분이 들었다. 상담실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짙은 갈색의 사각 테이블이었다. 문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는 벽지 색보다 조금 짙은 하늘색 청 남방을 입고 있었고, 잠깐 일어났을 때 봤던 바지는 연한 회색 빛의 면바지였다. 청남방과 바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벨트 색은 그가 앉아 있는 탁자의 색상과 비슷한 짙은 갈색이었다. 그는 마치 이곳에 계속 살았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공간과 그가 너무나 잘 어울려서 새로운 공간이었지만 금방 편안해짐을 느꼈다.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에서 '나는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어. 이미 다 가졌거든.' 하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더 이상의 욕심을 낼 필요가 없는 편안함이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기 앉아. 난 지금 페퍼민트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너도 괜찮니?"

나는 사실 페퍼민트 같은 허브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라면 같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시헌아, 난 정신 상담을 하는 선생님이야. 쉽게 말하면 네가 힘들어하는 그 상황을 조금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 나를 그냥 편하게 류 선생님이라고 하면 돼."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나에게 차를 먼저 마시라고 권했다.

차를 몇 모금 마시는데, 류 선생님이 말을 건넸다.

"시헌이는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야?"

"없습니다."

류 선생님은 예상했다는 식으로 다시 질문했다.

"시헌아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가 보고 싶기도 해. 시헌이도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시헌이 스스로 그 누군가를 불러 내면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누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네가 지금 무언가를 잘하고 있을 때, 그것을 누구한테 얘기해 주고 싶거나 보여 주고 싶은 사람 말이야."

"그런 사람도 없어요."

하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이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구나."


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질문을 했다.

"시헌아, 그러면 요즘엔 무엇을 할 때 마음이 편하니?"

"요즘 책을 읽고 있어요. 아주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냥 책을 읽다 보면, 이곳에서의 힘든 상황에 위로가 되곤 해요."

"이곳에서의 생활이 많이 힘드니?"

"네 많이 힘들어요. 어느 날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숨이 차요. 그럴 때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 제 목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아요."

류 선생님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제가 저지른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수백 번, 아니 수천번 생각했어요."

"그랬구나."

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한 사람도 나를 구해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헌아, 그럴 때 넌 어떻게 하니?"

"억지로 잠을 청해요.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 잠이 오지 않아요. 그래도 억지로 새벽에 잠이 든 다음에 아침에 일어나면 순간 눈을 뜨기 전에 잠깐 생각해요. 이건 꿈일지도 몰라. 하지만 눈을 떴을 땐 차가운 창살이 보여요."

"그럴 땐 많이 힘들겠구나."

"네. 맞아요. 깊은 절망감에 제 몸이 바닥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아요. 여름날 달구어진 팬에서 녹아내리는 설탕 시럽처럼 말이에요. 그런 날은 정말 아무것도 할 의욕이 없어져요."

"혹시 이곳에서 그래도 괜찮은 순간은 없었니?"

"네. 방에 있는 친구들이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서 전 순간 깨닫죠. 그리고 그렇게 웃어버린 저에게 화가 나요. 웃지 말아야 하는데, 웃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죠."


류 선생님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시고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시헌이가 많이 힘들구나. 그럴 거야.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시헌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크고 작은 죄를 짓는단다. 시헌이도 죄를 짓고 이곳에 들어와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고. 그렇다고 그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네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아. 네가 죄책감으로 인해서 너무 무겁게 삶을 짓누르는 대신 그 죄책감을 또 다른 곳으로, 네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나는 류 선생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는 검은색과 갈색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람의 눈빛으로도 이렇게 따스함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이제까지 네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벗어나서 네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봐. 여기 있는 시간은 힘들고 긴 싸움이 될 거야. 하지만 네가 너의 쓰임을 깊이 생각해 보고, 누군가를 도울 준비를 한다면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헛된 일만은 아닐 테니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던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하는 일들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거든. 네가 누군가의 생명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을 고민해 보길 바라.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죄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 훨씬 긍정적일 것 같구나."

"저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지 못해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 선생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에겐 아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고요. 이제 돌아갈 집도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는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했을 뿐이야. 삶의 방향을 정하면 나아갈 힘이 생겨. 책을 읽을 때 위로가 된다고 했지? 그리고 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했지. 책 속에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집중하렴. 책 속에서 너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말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다시 한번 절망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에겐 더 이상의 책이 없어요. 책을 전해 주시던 담임 선생님도 외국으로 가셨거든요."

류 선생님은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헌아, 세상엔 책이 정말 많아. 선생님은 외국으로 가셨지만 그 책은 선생님의 마음과 연결된 거라고 생각해. 사람은 곁에 늘 있어주지 못하지만, 책은 언제든지 펴는 순간 만나게 되어 있잖아. 선생님은 네가 책을 읽으면서 늘 곁에 선생님의 마음과 주인공들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으셨을 거야."

그리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 표정으로 류 선생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담임선생님이 책을 더 이상 보내주지 못하시지만, 네가 만약 책을 더 읽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저를요?"


류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아는 친구가 책방을 하고 있어. 헌책방이지만, 책이 굉장히 많아. 그런데 헌책방에 들러서 책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내가 너한테 그 책들을 조금씩 가져다줄 수 있어."

"그런가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요. 저희 담임선생님이 가져다 주신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게 거의 처음이에요."

"언제부터 책을 읽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언제까지 읽을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삶의 방향으로 세울 것인가가 중요하지. 칼은 가족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칠 수 있어. 사람도 마찬가지야. 우리도 누군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몰라. 단지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해야 돼. 난 시헌이를 많이 알지 못하지만, 네가 책을 통해서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달라지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이지. 죄는 사라져서는 안 돼. 피해자는 존재하니까. 목숨을 잃었어도 그 슬픔을 잊지 못하는 가족들도 있고, 그가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인생이 있는 거니까. 그만큼 네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거야. 그 방법을 시헌이가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해 내 거지 같은 인생으로 인해, 내 앞에 앉아 있는 류 선생님이 또 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싫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시헌이한테 약속할게. 일주일에 한 번 너를 만나러 올 때마다 책 두 권을 가져다줄게."

"저는 돈이 없는데요."

"걱정 마, 내 친구 헌책방에는 남는 책들이 많거든. 팔기에는 애매한 그런 책들 말이야. 그런 책들 중에도 보물 같은 것들이 참 많아."

"감사합니다."

나는 그냥 누군가와 세상에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 길도 담임 선생님이 어어준 세상의 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 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치고 상담실을 나와 오교도관과 함께 있던 건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와 누워 책을 펼쳤다. 수많은 글자들 사이로 류 선생님의 눈빛이 떠올랐다. 처음이지만 익숙한 그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너만 불행한 게 아냐. 누구나 행복한 순간만 갖고 살아가진 않아. 그러니 한번 해보자. 네 인생'

류 선생님이 상담을 마치고, 뒤돌아 나오는 나에게 하신 마지막 말이었다.

밤새 류 선생님의 눈빛과 그 말들이 뒤엉켜 내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음 주 수요일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