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계절이 흐르고 375번은 출소를 했다. 283번은 375번이 7개월 정도 더 남았는데, 나간 것이 아무래도 부모가 힘을 쓴 덕분이라고 하면서, 아무리 부모는 자식이 큰 잘못을 저질러 미운 마음에 관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역시 힘이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내가 저지른 죗값을 제대로 치러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만약 내게도 영향력 있는 부모가 있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난 더 이상 똑같은 실수를 하는 삶을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겐 다시 돌아갈 가족과 집이 없다.
그래도 류 선생님과의 상담 시간이 내겐 많은 힘이 되었다. 류 선생님은 내게 상담을 올 때면 두 권의 책을 가져다주었는데, 가끔은 더 많이 챙겨 오는 날도 있었다. 류 선생님과의 상담은 매주 이루어지다가 한 달에 두 번 상담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2주치를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류 선생님은 내가 많이 안정을 찾고 있다고 하셨고, 다음 상담을 기다리는 힘도 길러졌다고 했다.
류 선생님이 가져다준 책은 읽어보지는 못했어도 많이 들어봤던 책이 있었고, 처음 들어본 생소한 책들도 있었다. <죄와 벌>, <좁은 문>, 그리고 <어린 왕자>, <키다리 아저씨>, <톰소여의 모험>, <이방인> 그리고 <명상록> 등 류 선생님은 내가 읽으면 좋을 법한 책들을 모조리 다 챙겨 오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이 전해 주는 책들은 새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나 깨끗하고 완벽하게 보였다. 나는 그 책들의 가격을 살펴보곤 했는데, 적어도 류 선생님께 이 책 정도의 값어치가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한 번은 비가 엄청 내리는 날이었는데, 류 선생님의 옷이 많이 젖어 있었다. 카키색의 코트가 비에 젖어 회색빛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선생님이 건네준 책은 가방에서 하나도 젖지 않은 상태였다. 책을 꺼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선생님을 보면서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챙기는 선생님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괜찮아. 지나가는 비야. 곧 그칠 거야. 그러면 옷도 금방 마를 거고."
류 선생님은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웃음을 짓더니 챙겨 온 책을 보라고 손짓했다.
"이 책 주인공은 고아였지만, 자신을 후원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위로하게 돼. 이상하게 글은 타인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을 성장시키게 되는 것 같아. 이 책도 소설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지. 나도 예전에 너보다 어릴 때 읽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 그냥 그날의 일들을 기록하고 싶어 지더라고."
선생님이 손에 든 책은 <키다리 아저씨>였다. 책 표지에 키다리 아저씨처럼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희망을 주는 이야기네요. 부모가 없이 혼자 사는 아이들에게요."
류 선생님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 꼭 고아들에게만 힘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세상에 모든 부모들이 자식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은 아니거든."
류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때로는 고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애들도 많다는 걸 기억해. 각자 처해진 상황은 모두 상대적인 거야. 내가 갖지 못한 것이 타인에게 있다고 그들이 꼭 행복한 것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부모에게 많이 맞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가져다주시는 책을 재밌게 읽고 있어요.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은 밑줄도 긋고 있고요. 힘들 때, 그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해요."
류 선생님은 환하게 웃었다.
순간, 나도 류 선생님처럼 환하게 웃을 뻔했다.
그 미소만으로도 타인을 살고 싶게 만드는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류 선생님은 책 정도 되는 두께의 노트와 볼펜을 주셨다. 볼펜은 윗부분이 말랑말랑해서 촉감이 부드러웠다.
"네가 좋아하는 그 문장들, 여기에 적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간단히 그날의 일들과 너의 생각들도 적어봐. 우리가 흘려보내는 이런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류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나중에 사회 나와서 갚으면 되잖아. 음, 기대되는데."
류 선생님은 상담을 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이라기보다 다정한 형처럼 느껴졌다.
류 선생님과 지난 2주 동안 무슨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지난주, 야외 운동 시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냈다.
"정신적인 건강은 신체적인 건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이상하게 신체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고민하거나 힘들어했던 부분이 조금 사라지게 되더라고. 그러니 운동을 한 번 해 보는 건 어때? 시헌이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류 선생님의 제안을 나는 받아들였고, 매일 주어지는 야외활동 30분 동안 달리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야외활동 시간에는 그냥 한쪽 의자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곤 했는데, 이젠 30분 내내 달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무엇보다 류 선생님이 나를 위해 애쓰는 만큼 나도 그에게 열심히 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의 방식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정 상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공기가 폐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럴 때면 기존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희망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에게 이곳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아이들은 달리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자신들과 달라질 누군가를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도 야외 활동 시간에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방에 있는 아이와 부딪혔다. 분명 내가 앞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앞질러 가면서 부딪혔다. 어쩌면 나와 부딪힐 목적으로 뛰어 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눈썹 위에 상처가 아문 자국이 있는 그 아이는 여기 수감되어 있는 아이들 중에 최고로 덩치가 크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우리는 그를 '칼집' 이라고 불렀다. 칼집은 내가 달리기를 할 때면 나를 비웃으면서 바라봤는데 난 가끔 방에 들어와서도 그 눈빛이 떠오르곤 했다. 그전에도 이미 출소한 375번과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던 칼집은 375번과 의리있는 약속을 지키려는 것처럼 나에게 다짜고짜 따질 기세로 달려들었고, 나는 그 순간 교도관을 힘껏 부르며, 손을 들었다. 교도관은 호루라기를 불며 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배가 너무 아프고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요."
교도관은 몇 차례 내가 의무실에 실려 갔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부축해서 들어갔다. 나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랐을 때, 교도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교도관님 죄송해요. 사실은 거짓말이었어요."
"왜 그랬어. 난 갑자기 뛰다가 무슨 일이 생겼나 했네."
"아니요. 다른 방에 있는 아이가 저에게 시비를 걸려고 해서 피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교도관은 등을 한 번 툭 치고는 잘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무실에 잠깐 앉아 있다가 가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의무실에 앉아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고, 30분이 지나서야 다시 우리 방으로 돌아갔다.
"시헌이 대단한 걸. 그 아이와 크게 부딪힐 걸 뻔히 알고 미리 피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 선생님은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지혜로운 선택일 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곳에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류 선생님이 말했다.
"요즘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니?"
"엄마 생각이요."
나도 모르게 바로 답이 나왔다.
"엄마 얼굴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그런데 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면 엄마 얼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아빠를 많이 닮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할머니도 가끔 제 눈이며, 입술이 엄마를 닮았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보고 싶은 거니?"
"아니요. 이런 모습으로 만나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로만 남을 것 같아요. 엄마는 저를 잊고 사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왜 자꾸 엄마를 생각하는 거야?"
"그냥요. 엄마도 제 나이쯤, 그러니까 자기 자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 저를 만났으니 얼마나 당황했을지 생각해요. 사실 예전에는 원망도 많이 했는데요. 이젠 그런 생각보다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류 선생님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엄마였어도 우리 집에 들어와 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저희 집엔 희망이라는 것이 없었거든요. 그냥 배 고프면 밥 먹고, 함께 있지만 서로 절대로 화목해서는 안 되는 집 같았어요. 그나마 할머니가 제게는 유일하게 따뜻한 존재였죠."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은 후회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 시절, 그들에겐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그들도 그 시절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류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어떤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말했다.
"시헌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데 들어볼래?"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류 선생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앉아 있는 자리 뒤쪽 창가에 잠깐 멈췄던 비가 굵게 변하더니 창가에 요란한 소리로 부딪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