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너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거야
아버지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뒤로 물러서며 손을 뒤로 감추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갔고, 아버지 다리 위로 물이 차올랐다.
그 물은 금세 허리까지 차올라 나는 이 물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물에 빠지지 않았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물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뒤섞여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숨은 점점 거칠어졌고, 내 기도는 곧 터질 듯했다. 마지막 발버둥을 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낄낄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 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283번이었다. 그 손에는 물컵이 들려 있었고, 담겨 있던 물을 모두 쏟은 모양이었다.
375번이 출소한 이후 마치 자신이 이 방을 점령해 버린 것처럼 예전에 눈치만 보던 그가 아니었다.
새로 들어온 876번 얼굴에 아침부터 물을 쏟아 버린 것이다.
375번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말하던 그도 비슷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가면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375번 뒤에 숨어 자신이 숨겨 놓았던 본성을 대리만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행동을 통해 심리 보상을 맛보고, 숨어서 그를 욕하며 자신을 위로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너 이 새끼 우리가 그 말을 믿어 줄 거라 믿었지?"
283번은 그 옛날 범죄자들을 물고문했던 악마의 탈을 쓴 자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야, 난 거짓말 한 적 없어."
새로 들어온 876번은 믿어달라는 표정으로 283번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난, 진짜 애들한테 주스를 준 죄밖에 없어."
283번은 입이 삐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비웃었다.
"너같이 억울하다고 하는 녀석치고 진실을 말하는 놈이 없다는 거 모르지.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우리한테는 안 먹혀."
283번은 이미 이 방에서 악마가 되어 버린 표정으로 876번의 젖은 머리카락을 엄지발가락에 한껏 힘을 쥐고는 밟아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몰아쉬었는데, 283번은 그걸 설명하라는 신호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673번, 이 새끼 마약 유통책이야. 비겁한 새끼지. 다른 사람 인생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거지."
283번은 다른 범죄는 다 용서해 줘도 마약과 관련된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상대방의 정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고, 더욱이 자신의 친구도 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자기 나름대로 876번이 거짓말하는 가장 큰 증거는, 자신은 그 약을 탄 주스를 마시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283번, 그래서 876번은 이미 죄에 대한 처벌을 받는 중이잖아."
갑자기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고, 283번은 평소 말이 없는 내가 신기하기라도 하듯이
비웃으면서 876번 괴롭히는 것을 멈추었다. 283번은 자기 자리 돌아가며,
한 번 먹는 것에 나쁜 짓을 한 놈들은 다시 할 가능성이 70퍼센트는 넘는다면서
아무 근거도 없는 확률로 자신의 말에 신빙성을 높이려고 했지만,
방 안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그의 말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방안에 있는 아이들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보다
그들이 벗어나기 힘든 이 지루한 공간에서 좀 더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이런 공간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자가 불리한 법이다.
오늘 오후에는 특별 강사를 초청해서 명상 시간이 있었고, 연이어 가죽 공예실로 이동했다.
283번은 다른 방에 소문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다른 방의 험상궂은 아이들은 876번을 예전의 나를 바라봤던 눈빛으로 바라봤다.
876번은 새로운 먹잇감이 된 셈이었다.
"진실을 말하지 마."
876번은 마치 실체 없는 영혼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너에 대한 이야기를 가급적 하지 마. 인상을 보고 그 사람을 믿고 솔직해지면 이곳 생활이 힘들어져. 그 진실이 너를 불리하게 만들 거야."
"형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응, 나에게도 마찬가지야. 나도 좋은 일을 해서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876번은 내 말을 듣고 안심이라도 한 듯이 살짝 웃었다.
"그런데 전 정말 약을 탄 적이 없어요. 그런데 모든 증거들이 저에게 불리한 것들 뿐이었어요."
"난 너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아. 하지만, 세상은 진실마저도 외면할 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맞아요. 진실과 함께 버려지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되었어요."
카드지갑을 다 만들어 갈 무렵, 876번은 큰 결심을 한 듯이 말했다.
"알겠어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을게요. 제가 제 진실을 밝혀내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그래도 널 좋아하는구나."
"아니요. 이런 제가 좋을 리 있겠어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거든."
나도 모르게 876번이 말하는 것이 진실일 것이라고 믿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