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은 절대 없어
박교도관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이곳을 떠난다고 했다. 나를 위해 책을 골라 주었던 고마운 사람. 떠난다고 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익숙한 순간에 떠나버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감정은 받아들여야 하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한 감정으로 희석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감사했어요."
야외 운동 시간에 지나가는 박교도관에게 말했다.
"감사하긴, 나도 너 덕분에 책을 가끔씩 읽게 됐어."
박교도관은 내 어깨를 한 번 토닥여 주고는 뒤돌아서 나를 불렀다.
"근데, 내 친구가 그러는데 책을 읽는 사람은 변화할 가능성이 많다고 하더라. 책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거래. 그러니까 알지?"
박교도관은 눈을 한 번 찡긋하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박교도관 발령과 맞물려 눈 사이가 유난히 멀어 보였던 658번도 출소했다. 이곳에서는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것보다 누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마치 계절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이어서 우리 방에는 934번과 976번이 들어왔다. 그 둘은 금세 말이 많은 283번이 이 방의 실세인 것처럼 283번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283번은 이런 기세로 876번에게 틈만 나면 시비를 걸었지만, 다행히 876번은 자신의 누명을 벗겠다는 목표를 정해서인지 283번의 시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283번은 자신의 덫에 걸리지 않아서 약이 올랐는지 다른 아이들에게도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375번이 나가기 전까지 타인을 괴롭히는 악한 본성을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결국 문제는 183번에게 시비를 걸면서 터지고 말았다.
유난히 밝았지만, 냉기가 스며드는 날이었다. 그날도 목공 수업과 심리 명상을 끝내고 들어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70대 치매 아버지를 아들이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뉴스를 보다가 283번은 아주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씩 웃으며 183번을 쳐다봤다. 183번은 안 그래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의 잦은 폭력으로 괴로웠던 183번. 그는 아버지를 폭행했고, 아들을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해서 감옥에까지 가게 만들었다는 또 다른 죄책감으로 그의 어머니는 자살했다고 283번이 말했던 기억이 났다. 283번의 교활한 그 웃음을 분명 183번은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아버지를 때리는 것과 죽이는 것은 한 끗 차이지 않나?"
283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것처럼 킥킥대며 말했다.
"어디를 때리느냐의 차이죠. 한 방으로도 훅 가기도 하거든요."
976번은 주먹으로 사람을 치는 흉내를 내면서 흥이 난 듯 말했다. 976번 역시 집단 폭행으로 들어왔다고 들었다. 마치 자신의 무용담을 생각하면서 흥분한 듯했다.
'때릴 때 무슨 느낌이야. 쾌감 같은 게 느껴지나?"
다른 친구들의 돈까지 끌어모아 사이버 도박을 했다는 934번 역시 비겁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순간, 난 그들의 얼굴 위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보았다. 한 마리였던 바퀴벌레는 순식간에 수백 마리로 변하는 듯하더니 그들의 얼굴을 덮어버리고는 입 속으로 모두 들어가 버렸다. 구역질이 났다. 사람의 본성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생각했다. 사람의 본성에는 분명 악한 부분과 선한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이 안에 갇혀 버린 우리에게 선한 본성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기는 하는 것인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나 또한 이런 악한 존재로 보였을 생각을 하니, 가슴에 있던 큰 덩어리가 치받쳐 목구멍을 꽉 막아 버리는 듯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토할 수 있는 만큼 토해 버렸다. 악한 본성에 찌든 내 장기까지 토해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악한 본성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183번이 들어왔다. 아무 일 없이 그저 손만 씻었다. 그리고는 냉기로 차가워진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참 바라봤다. 마치 거울 속에 또 누군가를 저주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섬뜩한 것이었다.
183번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벽을 보고 누웠고, 283번이 그 이후에도 부모한테 잘해야 한다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는 동안 183번은 잠이 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183번은 여전히 계속 누워 있었다. 나는 밥을 먹으라고 깨우려다가 화장실에서 본 그의 눈빛이 떠올라 그대로 두었다.
유난히 차가운 냉기가 건물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져 이불을 목까지 끌어서 덮고 누웠는데, 다른 아이들은 몇 번 뒤척이다가 잠에 빠져 들었다.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내 허리를 발로 힘껏 차는 바람에 잠이 깨고 말았다. 순간, 누군가가 불을 켰고, 교도관을 불렀다. 멀리서 빠른 속도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에 떠오른 것은 183번의 섬뜩한 눈빛이었다. 고개를 돌려 한 덩어리로 얽혀 있는 쪽을 바라봤을 때, 이미 283번의 목에선 이상하리만큼 탁해 보이는 검은빛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반으로 잘린 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183번의 손은 283번의 목을 쥐고 있었다. 183번의 손은 예전에 자신이 죽으려다 실패한 기억을 더듬어 절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서려 있는 듯 283번의 목을 있는 힘껏 짓누르고 있었다. 순간, 183번은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겁에 질린 곤충처럼 바둥대기만 하고 있었다. 난 순간, 나도 모르게 183번을 힘껏 밀쳤고, 그는 283번 옆에 쓰러졌다. 183번은 다시 283번에게 달려들었지만, 나는 183번을 뒤에서 잡고 힘껏 뒤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그를 뒤에서 힘껏 끌어안은 채, 그의 귓속에 말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해. 더 이상 너를 망가뜨리지 마."
183번은 교도소 안이 울릴 정도로 목놓아 울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울음은 언젠가 한 번은 터져 버렸어야 하기에 그냥 그대로 두었다.
결국 응급차가 도착했고, 283번의 목을 지혈하던 교도관들은 더 이상 소란이 없도록 우리를 주의시켰으며, 183번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934번과 976번은 283번이 남기고 간 핏자국을 열심히 닦았다. 그날 밤, 우리 방은 숨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고요했다. 모두들 더 이상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다음 날은 류 선생님과의 상담이 잡혀 있었다. 평소와 달리 마음이 무거웠다. 지난 가죽공예 때 만든 카드지갑을 챙겼다. 상담실로 걸어가면서 183번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우리는 결국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인지 그리고 183번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을지, 283번은 자신이 잘못한 행동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류 선생님은 아주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셨다.
류 선생님 역시 지난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알고 계셨고, 나의 심리상태를 걱정하셨다.
"선생님, 사람은 참 고치기 힘든 존재인가 봐요."
"어젯밤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 거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이 자주 말하던데요. 예전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통화를 하던 한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요. 그 말은 결국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잖아요."
"맞아. 그 의미는 그게 맞는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거지."
"성형수술로 얼굴은 쉽게 고쳐지는 것 같은데, 마음은 왜 쉽게 고쳐지기 힘든 걸까요?"
"마음은 다른 사람이 쉽게 들여다볼 수 없잖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고치지 않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 거야."
"자신의 의지가 없이는 힘들다는 말씀이네요."
"그럼, 당연하지. 담배나 술도 끊기 힘들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하루 만에 끊기도 헤. 끊어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만큼 강한 것이 없거든."
선생님은 내 표정을 잠깐 살피고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친구가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도 되는 건가요?"
"당연히 되지. 이 책이 너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만 있다면, 이 책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인 걸 거야."
그리고 잠시 류 선생님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내셨다.
"시헌아, 그리고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상담이란다."
나는 아무 말을 못 하고 선생님만 바라봤다. 선생님과의 관계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교도소가 나만을 위한 시설도 아니고, 더욱이 아무런 대가 없이 류 선생님과의 상담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저를 도와주신 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어요.".
순간, 카드지갑이 생각났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지난 가죽공예 시간에 만든 카드지갑이에요. 선생님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사실 이런 거 잘 못하는데 선생님 드린다고 생각하면서 신경 써서 만들었어요. 이게 마지막 선물이 되어 버렸네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요."
나는 류 선생님한테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는데, 보잘것없는 카드지갑을 드리면서 선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시헌아.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선생님. 선생님은 저에게 미안해하시면 안 되는 분이에요. 그동안 주신 책들도 너무 감사했어요."
"시헌아, 책은 걱정하지 마. 너한테 꾸준히 보내줄 테니까. 친구 하고도 벌써 얘기했어. 생각보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헌책방에 책이 넘쳐 나거든."
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치고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류 선생님은 나를 한 번 안아주시면서 귓가에 들릴만큼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네가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지 마. 그런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까 너를 믿고 가는 거야. 알았지?"
류 선생님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