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잊혀진 283번, 그리고 남겨진 우리

by 이생

누구에게나 나쁜 시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좋은 순간들이 우리 삶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정적인 일들이 더 부각되기 쉬우며, 잘 잊히지도 않는다. 그것은 트라우마로 남게 되며, 우리의 삶을 뒤흔든다.


부모들은 분명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 사랑의 결과로 자식을 낳았다. 하지만 문제는 사랑하는 순간부터가 시작이 아니라, 자식을 낳은 순간부터 인내심이 발현된다는 점이다. 순간의 사랑을 넘어서는 인내력이야말로 자식에게 더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랑이 본능에 가깝다면, 인내력은 인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먹지 않는 날엔 너무나 멀쩡했다. 그런데 술을 먹은 후에는 난폭하게 변해서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차이를 보였다. 반복적인 횡포로 결국 두 아이를 남기고, 그의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런 상황이면, 가해자는 남겨진 가장 약한 존재들을 괴롭히게 마련인데,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여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폭행했으며, 그의 엄마가 집을 나간 이유를 아이들에게 덮어 씌웠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동시에 무가치함을 철저히 경험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점점 무능해졌으며, 아이들은 밤에도 연탄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운 경험을 해야 했다.


한 번은 연탄을 갈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돌아왔고, 마침 아버지의 귀가로 놀란 그는 연탄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성질을 건드려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그의 아버지는 달궈진 연탄집게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결국 그는 정수리 부분에 화상을 입었고, 상처는 시간이 지나 아물었지만, 그날의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연탄집게는 그의 가슴에 늘 똑같은 상처를 반복해서 새겼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폭력에 휘둘렸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그는 달라졌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여동생 또한 이제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터득이라도 한 것인지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고, 그에게는 그것이 훨씬 마음 편한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에게 맞을 일들이 사라졌으며, 동생이 더 맞을까 봐 집에 머물러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집은 더 이상 안락한 장소도 아니었으며, 자신들을 보호해 줄 보호자가 있는 곳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그곳에 머물지 않아도 자신이 잘 곳은 차고 넘쳤다. 혼자 자취하는 친구집이 아니더라도 한적한 무인 편의점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우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집보다 편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잦은 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이후의 청소년기는 대범해지기 시작했고, 잠을 재워주는 친구들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해 친구들과 함께 하는 범행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여러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까지 들어왔으며,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283번을 열심히 쫓아다니던 934번과 976번은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의 짐을 챙기면서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이곳에 와서 283번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나였지만, 그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를 늘 탐색 중이었을지 모른다. 283번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934번과 976번으로 정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을 전해주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쯤 물어봐 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283번을 죽음으로 몰고 간 183번은 살인자가 되었고, 다른 방으로 분리 조치되었다. 이곳에 갇힌 우리들은 이 생활이 죗값을 치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종종, 이곳에서의 생활 또한 또 다른 죗값의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착각, 혹은 죗값을 다 치렀다는 잘못된 해방감이 우리를 또 다른 범죄로 이끌기도 한다.


"아버지 하고 여동생 하고도 연락도 잘 안 하면서 지냈다던데, 그 형 너무 불쌍해요."


한 상자도 안 되는 짐을 교도관에게 전달한 후, 자리에 앉으면서 976번이 말했다.


"정말 죗값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형의 아버지 아니에요?"


934번도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생긴 것처럼 울먹였다.


그래도 283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짧고 고통스러운 삶이 그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어쩔 수 없는, 억울한 유년 시절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인생을 망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믿게 된다.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를 버렸지만, 돌아보면 그때 버려진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였다. 동시에 어머니 또한 버려진 존재였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늘 마음속에 새기며, 잘 살고 싶지도 않았다. 버려진 우리에게 세상은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여겼고, 링컨처럼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도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힘 따위는 나에겐 없다고 믿었다.


283번, 그의 죽음은 분명 슬픈 일이다. 불행하게 성장한 책임은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지만, 결국 그를 이곳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283번의 비굴한 폭력과 폭언을 경험하고도 침묵했던 우리, 그 행동을 묵인함으로써 마치 그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게 만든 이 방 안의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


살인자가 되어버린 183번이 말없이 누워 있던 그날 저녁, 입안으로 밥을 넣는 우리가 모두 역겨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한 명도 283번을 말리지 않았으며, 183번을 위로하지도 않았다. 183번이 283번을 찌르기 전, 183번은 이미 마음속으로 자신을 살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선명했던 283번의 핏자국이 지워진 것처럼 그의 이야기도 우리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갔다.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누군가는 이곳을 떠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 달 후면 나 역시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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