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돌아오지 않을 곳을 떠나며

by 이생

인간은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감옥이라는 곳에서는 삶을 지속될 수 없을 것 같았고, 호흡이 불가한 사람에게서 산소호흡기를 빼앗는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역시 사람들은 존재했고, 삶이 지속되었다.

평범했던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시간들이 더 많았다. 한쪽에 쌓아두었던 책은 원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버티게 해 주었던 몇몇의 책들은 다른 짐과 함께 챙겼다.


"형,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거야."

같은 반 친구의 지속되는 성적 모욕을 참지 못하고 폭행을 저질러서 이곳에 들어오게 된 1003번이 말했다.

"난 돌아갈 집이 없잖아. 그래서 임시로 거주할 집을 마련해 주셨어. 잠깐이겠지만, 그동안 얼른 내가 스스로 살 곳을 마련해야지. 아주 작은 월세라도 내가 들어갈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

얘기하면서 나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그래도 이제 성인이니 일을 할 수 있잖아. 난 사장이라면, 형을 고용할 것 같은데."

"말이라도 고맙다. 처음엔 많이 어색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고 싶어."

"맞아. 난 나보다 형을 더 믿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그 작은 신뢰가 불안했던 나를 일으켜 세우는 듯했다. 그렇지만, 분명 내가 마주하는 세상은 3년 전의 시간보다 더 힘들 것이라는 걸 잘 안다. 내 곁에는 이제 정말 아무도 없으며, 연락할 사람이나 친구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서 만난 몇몇이 나가면서 준 연락처가 있기는 했지만, 다 버렸다.


그들도 나처럼 모두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처럼 힘들 것이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내가 그들에게 의지하는 순간, 그들과 나는 각자의 삶을 살아내기보다 나와 너의 그 어중간한 형태의 존재를 만들어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무엇보다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를까 봐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형, 내가 여기서 나가면 형한테 꼭 연락할게요."

1003번이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절대 그러지 마.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과 만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그렇고, 너도 이곳을 나가게 되면, 다시 이곳에 들어올 일이 없도록 잘 살아보자. 알았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의 조언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디 좋은 사람을 만나. 그리고 너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길.'


짐을 챙기고 신분증과 기타 물품을 전해 받았다. 교도관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겉 봉투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민 교도관은 친근한 미소로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했다.

"나가서 진짜 잘 살아야 한다. 알았지?"

그의 마지막 말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진정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간절히 바라던 교도소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난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순간, 마음 한편에 순간적으로 다시 교도소 안이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익숙함에 속지 말자."

마음속에 새기듯 입 밖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길은 미끄러웠다. 조심스럽게 걸어서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가림막 하나로도 바깥의 공기보다 훨씬 춥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교도소에서 안내해 준 임시주거 시설로 가는 버스 13-5번을 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민교도관에게 건네받은 편지가 생각났다. 열어보니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 12-8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후에 내릴 것.

하차한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가는 길>이라는 책방이 있으니 편지를 받으면 그곳으로 오길 바람.

류 선생님의 간단한 메모였다.

예전에 선생님과 함께 상담했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얼어붙었던 땅 위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입 밖으로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날씨였지만, 마음만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으로 떨어진 눈은 내 손의 온기로 금방 사라져 갔다. 지금까지 수없이 겨울철 눈을 마주했지만, 오늘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2-8번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천 원을 요금통에 넣으니, 800원을 거슬러 주었다. 미끄러지듯 나에게 달려드는 동전 여덟 개에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세상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기분이었다.

버스에는 세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형태만 보았을 뿐 그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서 짐을 들고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온 듯한 형색으로 버스를 타는 사람을 그들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난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고 싶지만, 내 발걸음을 거대한 공기층이 막고 있는 것처럼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보면서 내가 상상했던 장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내게 펼쳐진 삶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마음속으로 되물었다.

짧은 생각들이 스치는 사이, 어느새 세 번째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가는 길> 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화선지에 붓글씨로 쓴 것 같은 작으면서도 분명한 글귀였다. 버스 안에서의 위축된 마음과는 달리 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성큼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긴장된 내 마음을 오히려 더 떨리게 하는 것 같았다.


학교 도서관에 있을 법한 책장들과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책장과 책장 사이는 좁았지만 그 사이에 있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이상한 상상을 했다. 그 밀집된 책장 사이에서 문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하얀 피부결을 지닌 한 남성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원하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그의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곳에만 오면 나보다도 나를 잘 아는 류 선생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순간, 떨리는 목소리로 교도관이 내게 건넸던 류 선생님의 메모를 건네며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 그게 아니고요. 제가 아는 분이 이곳으로 오라고 하셔서요."

순간, 얼굴이 하얀 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반갑게 다가왔다.

"아, 네가 시헌이구나. 얘기 많이 들었단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내가 들고 있던 짐을 나눠 들으며, 빈 의자를 내어 주고는 앉으라고 했다.

"난, 류 선생님 친구야."

류 선생님의 친구는 커피포트의 따뜻한 물로 코코아 한 잔을 타 주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현우한테 연락 들었어."

"류 선생님은 안 계신 건가요?"

"현우는 지금 외국 출장 중이야."

"그런데 왜 저를 이곳에 오라고 하셨는지."

류 선생님의 친구는 류 선생님 만큼 따뜻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바라봤다.


"시헌아, 사실은 현우한테 부탁했어. 네가 출소하면 이곳으로 보내달라고. 물론 현우도 일주일 후면 돌아올 거야. "

"저를 왜요?"


나는 순간, 그동안 공짜로 읽은 책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르바이트라도 얼른 잡으면 책 값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제가 그동안 너무 많은 책을 공짜로 읽었죠? 일을 가리지 않고 할 생각이에요. 제가 한 달 후에 책 값을 꼭 드릴게요. 정말 감사하고 죄송했어요."


갑자기 류 선생님 친구는 큰 소리로 한참을 웃었다.

"야, 시헌아,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사실 네 이야기는 현우한테 많이 들었어. 나는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공짜로라도 책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야. 그래서 내가 사업가 기질이 많이 부족한 편이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애써 지었다.

"사실, 시헌이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거든."

류 선생님 친구는 좀 전과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책장 사이로 보이는 창가로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당장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갈지 두려운 감정이 들면서도 내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에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마치 꾸지 말아야 했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순간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