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아는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가 떠난 이후,
나의 엄마는 83세, 43년생이다.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본의 아니게 남동생이 생기면서 막내가 아닌 셋째가 되어 버렸다.
나에겐 외할아버지의 기억이 없지만, 늘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알뜰히 챙기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데 엄마가 한 달 전에 언니와 함께 간 음식점에서 기절하시고 입원하신 후에 외할아버지를 원망하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엄마는 60세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하셨다. 내가 임용고시를 보러 가던 해에 어지럼증이 심하셔서 입원하셨고, 난 엄마 간병을 하면서 한 달 앞둔 임용고시 준비를 틈틈이 해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우울증 약을 계속 드셨고, 약을 복용한 후엔 심한 졸음으로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셨다.
오빠와 나는 그 이후로 엄마의 말벗이 되어 드리기 위해 매일 저녁 전화를 걸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 드렸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로 엄마의 우울증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어떤 날은 누군가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래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대상이 외할아버지셨다. 그래서 엄마에게 외할아버지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에 엄마와 대화를 하는데, 엄마가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응어리가 화병이 되어 우울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병명은 장티푸스였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여자가 남자 아기를 데리고 왔고, 그 아이가 외할아버지의 자손이라고 했고, 외할머니는 그 아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엄마는 막내가 아닌 셋째가 되어 버렸다.
엄마의 기억 속에 외할머니는 엄마 대신 막내가 되어 버린, 나에겐 외삼촌이 되는 그 사람을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어쩌면 외할머니는 그 아이가 외할아버지의 진짜 자손인지, 아닌지를 넘어서 자신의 엄마에게 버림받은 한 아이로서 측은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의 남동생이 되어버린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사랑 덕분인지 큰 문제없이 자랐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외할머니의 친자식이라고 알고 지냈는데, 동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한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막내 외삼촌은 자신이 외할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엄마와 이모까지 가족 모두를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린 외삼촌은 그 이후, 나의 어린 시절까지 공포의 대상이었다. 가끔 엄마에게 협박 전화가 걸려 오곤 했었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다른 곳으로 숨어야만 했다. 외삼촌은 엄마에게 우리를 쥐약을 타서 먹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이 그냥 협박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엄마의 언니 즉, 우리의 유일한 이모의 네 번째 손가락이 엄지 손가락보다 짧은 이유가 외삼촌의 난동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린 후까지 그렇게 가족들을 괴롭힌 것은, 어쩌면 엄마의 집에는 이모와 엄마 단 둘 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가장 큰 오빠인 외삼촌이 살아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의 기억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 외삼촌은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지만, 둘째 외삼촌의 친척 - 아기를 외할머니에게 두고 간 여자의 오빠 -이 자신에게 외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시한다면서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큰 외삼촌을 폭행해서 외삼촌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옷이 모두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결국 큰 외삼촌은 그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군에 지원했고, 그다음 해에 6.25가 터지고 말았다고 한다. 군에 간 이후, 단 한 번 면회를 나온 후, 전쟁이 나서 결국 돌아오지 못한 큰 외삼촌은 다리에 총을 맞아 들것에 실려 가는 중이라는 마지막 쪽지만을 남겼고, 그 이후 전사했다는 통보와 유골함만 외할머니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이모도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결국 엄마의 집안엔 엄마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런 긴 이야기들 이후에도 엄마는 늘 외할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83세인 엄마가 외할아버지가 남긴 작은 외삼촌 때문에 자신이 너무나 큰 불안 속에서 살아야만 했고, 이모의 네 번째 손가락도 잃어야 하는 끔찍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으며, 큰 외삼촌도 그렇게 일찍 군에 가지 않았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전쟁으로 큰 외삼촌을 잃은 엄마의 엄마인, 나의 외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큰 슬픔에 빠지셨을 것이고, 그 슬픔의 분위기 속에서 나의 엄마도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결국 둘째 외삼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밤에 관을 지키기 무서워 그다음 날에야 갔고, 아버지가 그 관을 밤새 혼자 지켜야만 했다. 둘째 외삼촌의 아내도 그런 폭행에 견디지 못해 둘째 외삼촌을 떠난 지 오래였고, 외삼촌의 아이들도 고아원에 맡겨진 이후였다.
아주 오래전 나의 희미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외삼촌의 얼굴, 그를 아는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가 떠난 이후, 엄마의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오랫동안 시달려온 불안함과 공포는 결국 엄마에게 우울증이라는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질병을 안겨주고 말았다. 엄마도 우울증 약을 끊어보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증세는 좋아지지 않았으며, 약은 점점 늘어만 갔다. 엄마는 낮동안은 열심히 집안 살림도 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셨지만, 약을 복용한 이후엔 약에 이끌려 잠들어야 했다.
예전에 친정에 와서 엄마가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엄마는 그다음 날 나와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고생한 엄마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매일 편안히 생을 마감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그립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는데, 어쩌면 내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원망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한번 꺼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년이면 내 나이 오십인데,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딸로서 나는 나의 엄마 마음을 너무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내 마음에 비가 내려 너무나 마음이 무거운 금요일이다.
엄마에게 따뜻한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재미있는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