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를 버리는 일 따윈 나하고 상관없어

by 이생

처음부터 버려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세상 일 대부분이 그렇게 어렵고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부모에게 방치된 아이였고, 주 보호자였던 할머니는 늘 살아있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최소한의 보호가 언제든지 쉽게 끝나버릴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최소한의 의지만을 지니기를 바라는 곳처럼 느껴졌다. 밥이 나오면 밥을 먹고, 어두워지면 잠을 자고,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면 대부분은 별문제 없이 하루가 잘 지나갔다. 나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성과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오기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는 곳. 이곳에서 평생 나가지 못하는 상상을 하면 순간 호흡이 멈출 것처럼 목이 조여오곤 했다. 예전에 누군가 이곳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면 평생 이 곳을 들락거리다가 인생을 마감한다고 했는데, 내 인생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도 죽기 전에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죽어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하면서도 그 시간이 내게 찾아오지 못하는 운명에 처할까봐 두려웠다.


세상에서 버려진 집단, 어떤 누구도 이제 관리할 수 없는 사람들을 모아 두는 곳. 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는 종종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서슴지 않고 일어나고야 만다. 사실 그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날 밤, 재수 없게 그 사건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3년이라는 시간을 잘 버텨내기만 하면, 20대 초반에 세상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처럼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선생님이 주고 가신 책이 분명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해 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선생님은 지난번 주고 가신 책 말고도 꾸준히 책을 한 달에 한 번 보내셨다. 학교 다닐 때는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책들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두는 일이 나에게는 꽤나 낭만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사실 내게 주어져서는 안 되는 사치 같은 것이었다.


헤르만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87쪽을 읽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책으로 소나기 같은 물이 쏟아졌다. 375번의 짓이다. 나를 보고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말고 덤비라는 표정이다.

"너, 문학 소년이니? 재수 없는 새끼! 그렇게 책을 읽을 거면, 학교에나 있지 왜 여기에 들어와서 분위기 흐리고 난리야."


사람들은 때론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을 방해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375번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고, 자신에게 책을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시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는 녀석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감옥이라는 곳에서도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어야 하는데, 내가 무언가를 이룰 것 같기도 하면서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아갈까 봐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사랑을 받은 녀석들이 저지르는 만행 같은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옆 눈으로 375번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나는 사실 375번과 길게 말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목공 수업에 283번이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375번은 같은 반 친구를 7개월 동안 계속 괴롭혀왔대. 심부름이란 심부름은 다 시키고, 다른 여자애랑 일부러 사귀도록 해놓고, 그 여자애를 데리고 오도록 시켰대. 결국 괴롭힘을 당하는 k는 여자 친구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데리고 가지 않았거든. 그랬더니 k를 옷을 벗기고 동영상을 촬영해서 그 여자친구한테 보냈다는 거야. 정말 미친 새끼지. 인간 말종이야. 결국 k는 모멸감에 그 날밤 옥상에서 뛰어내렸대."

"그런데 375번이 k라는 아이를 괴롭혔다는 증거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유서를 써 놓고 죽은 건가? 아니면 여자친구?"

"아니, k라는 아이가 죽은 후에 병원에 가서 부모가 몸을 보니 매직으로 몸에 자신이 당한 일들을 적어 두었더래."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리고 유서라는 것이 사라질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k는 자신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283번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왜 들어와 있는지는 잊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결국 경찰은 k의 여자친구를 통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고, 그 동영상도 확보했나 봐. 생각만 해도 끔찍해. 몸에 자신이 당한 일들을 빼곡히 적던 k의 마음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야. 375번 부모는 중소기업 사장인데, 변호사를 선임하고 돈으로 빼려고 해도 소용없었나 봐."

"그렇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돈으로 해결하겠어."

283번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이밀며 이야기했다.

"그게 아니야.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뭐가 있겠냐.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다른 이야기거든. 똑같은 사건일지라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범죄엔 특별찬스라는 것이 주어지거든. k의 부모는 감형이든 벌금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변호사 말만 믿고 안심했었나 봐. 그래서 375번이 여기에 들어와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완전 개똥만큼도 취급 안 했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네가 들어오기 전에 그 모습을 봤으면 아마 가관이었을 거야. 심지어 우리한테 자기 개로 지내면 변호사도 알아봐 줄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상황이 바뀌어 버린 거야?"

갑자기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375번 같은 인간에게 해피엔딩이 찾아오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k의 여자친구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대. 그리고 k가 죽기 전에 혹시 자신이 적은 기록들이 훼손될까 봐 하나씩 찍어서 여자친구 메일로 보냈나 봐. 마지막 작별 편지와 함께 말이야. 사실 그전에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미리 알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죽음으로서 이렇게 알릴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생각하면 내가 갑갑해진다니까. 결론은 저 새끼가 엄청 나쁜 새끼라는 거야. 인간 말종.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최악이 인간이지. 그러니 절대 저 놈한테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나에게 유일하게 연락을 하는 세상 속 한 사람, 그 사람이 보내 준 책, 바로 그 책에 물을 던졌다. 만약 이 세상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담임이 보내 준 책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375번은 결국 내가 잡고 있는 정신줄에 오줌을 갈겨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자신의 몸에 375번의 만행을 적었던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k라는 아이의 마음이 이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새끼야, 말을 해. 내가 여기 들어온 마당에 네가 도끼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봐도 무서울 게 없어. 난, 이미 나를 버렸거든."


매듭은 지어야 이 사건이 끝날 것 같았다.

"네가 너를 버리는 일 따윈 나하고 상관없어. 넌 네 인생이나 살아.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고."

말이라는 것도 기술 같은 것이어서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이게 말하려고 해도 상대방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말하는 기술이 없어 결국 몇 마디의 말이 비극적인 사태를 만들고야 말았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나는 어차피 내 인생을 포기해서 네 인생을 끝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375번은 결국 내 몸 위로 올라와 내 목을 짓누르면서 가장 큰 침방울을 내 얼굴에 튀기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내가 여기에 왜 와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꿈을 깨어나게 해 줄 귀신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375번은 며칠간 독방 신세를 지게 되었고, 교도관은 같이 싸우지 않은 것은 너무나 잘한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때로는 억울해도 저항하지 않는 것이 몇 배의 평안함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날이었다. 375번은 내 목을 굉장히 오래 누르고 있었는데, 같은 방에 있던 수감자들은 한창 좋은 구경을 즐기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내가 죽을 것 같은 창백함을 보이자 교도관을 소리쳐 불렀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보던 283번은 이 상황을 다른 수감자에게 전할 것처럼 눈빛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마도 283번은 변하던 내 눈빛과 핏줄, 그리고 안색까지도 생생하게 전하면서 375번의 형벌을 가중시키는 소문을 내고 다닐 것이다. 자신의 죄목을 잃어버린 283번, 그의 죄목이 궁금했다.


그날 밤, 283번이 375번에게 했던 '인간 말종.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최악이 인간'이라는 목소리가 375번이 내 목을 졸랐던 것처럼 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분명 375번이 독방으로 간 이후, 아주 평온한 잠자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숨을 쉬기 어려운 답답함이 밀려왔다. 갑자기 몸 이곳저곳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몸을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다. 내 몸속 깊숙이 그 가려움이 시작되었다. 피부 아래에서 그 가려움은 밤새 나를 괴롭혔고, 나는 벽에 머리를 찢고 나서야 그 고통으로 지쳐 잠에 들 수 있었다.


어떤 희망을 꿈꾸지 않아도 되니,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