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럴 자격이 없겠지만
선생님이 다녀가신 이후로 박교도관은 나에게 가끔 어떤 책이 읽고 싶은지 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박교도관에게 돈을 맡기셨다고 한다. 그 돈으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이나 추천할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꼭 싸 주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제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다시 돈을 되돌려 드릴 방법이 없으니, 생각해 보렴."
교도관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박교도관은 우리 사이에서도 유독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불필요한 친절이 우리 담임의 거절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 같은 인간에게 친절은 오히려 허황된 꿈을 품게 만드는 독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버려진 나로 살아가는 일은 금방 익숙해졌다. 사실 난 처음부터 혼자였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위로했다. 심지어 죄를 짓고 이곳에 들어와 있는 처지에 누구를 원망할 자격은 없다고 자책했다.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기억이 없는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받을 욕심을 가진다는 것은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더 냉정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나를 받아들일수록 이 공간에 갇혀 있는 시간이 그나마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나에겐 이곳만이 나를 받아주는 유일한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의 잘못을 마땅히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내가 희생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다짐했다.
이곳에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발견된다. 비가 엄청 많이 오던 날,183번은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더 이상 남겨두기 싫어 나쁜 선택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날, 우리는 평소보다 차가워진 날씨에 이불을 목까지 잔뜩 끌어 덮고 저마다 웅크린 자세로 일찍 잠에 들었고, 183번은 이 틈에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려고 결심했던 모양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것도 선택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아주 복잡하게 연결된 거미줄 같은 그물망 속에서 서로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하든 원치 않든 하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잠귀가 밝은 135번은 부스럭대는 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가 183번을 목격하고 말았다. 깊게 잠들었던 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135번의 형언할 수 없는 괴성을 듣고 깨어나고 말았다. 135번은 무서우리만큼 차분한 183번의 눈빛보다 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교도관의 귀를 찌르는 듯한 호루라기 소리로 그 사건은 마무리되었고, 결국 183번은 다른 방으로 옮겨 특별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남겨진 우리는 이미 183번의 죽음으로 가는 의식과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135번의 공포스러운 괴성과 표정을 지켜봄으로써 각자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검증을 머릿속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며칠 전부터 밥을 통 먹지 않더라고."
"머릿속으로 죽을 생각만 하는데 밥을 먹고 싶겠냐."
"근데 183번은 갑자기 왜 죽을 생각을 한 거지?"
"183번, 죄책감이 굉장히 컸을 거야."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283번이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엄청 맞고 자랐대, 물론 183번 엄마도 같이 맞았나 봐. 그러다가 183번이 아버지한테 대들면서 결국 아버지를 폭행했고, 결국 멈출 수 없던 183번이 아버지를 심각한 상태로 만들었나 봐."
"그런데 왜 자기가 죽어. 여기서 나가서 엄마를 지켜야지."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 저놈한테는 이제 삶의 목표가 없어졌어."
"왜?"
"어머니가 자살했대. 183번이 형 선고를 받는 날"
"그건 말이 안 돼. 왜 어머니가 자살을 하지."
그날따라 유난히 눈 사이가 멀어 보이던 658번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그동안 183번을 위해서 참고 살았나 봐. 그런데 결국 자신 때문에 183번이 감옥에 가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겠지. 나도 여기까지 밖에, 자세히는 몰라. 183번이 워낙 말을 하기 싫어해서."
평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유난히 말이 많은 283번도 183번의 일로 많이 놀란 눈치였다.
183번의 분리조치로 며칠 동안 우리는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과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밥통 안에서 밥이 되기를 기다리며 뜸을 들이는 밥통 안의 설익은 밥알처럼 저마다 속으로만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375번만 호기를 부리며, 태연한 척했지만, 375번 역시 부모님의 면회가 줄어들수록 조금은 불안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괜찮은 삶을 살아볼 계획 같은 것을 배워보지 못한 우리에겐 이곳에서의 생활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공허해지고, 더 비참해져서 다시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673번, 진시헌 면회"
나는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가 들릴까 봐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기침을 했다. 밖으로 나가 걸어가면서 박 교도관이 말했다.
"사실, 면회 온 사람은 없어."
순간, 좋아하는 풍선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가슴부터 울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죠? 이젠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 싶었어요."
박교도관은 유난히 따뜻한 눈빛으로 내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건네받았을 때, 나는 그것이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나도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어. 그래서 너에게 어떤 책을 사줘야 하나 고민해 봤거든. 그런데 내 친구가 국어교사여서 물어봤더니, 이 책을 추천해 주더라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 제목을 보고 박 교도관이 친구에게 어떤 내용을 전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런데, 사실 어려울지도 몰라. 나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난 조금 어렵더라고. 그런데 난 673번이 열심히 읽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이 책은 긴 소설을 청소년이 읽기 편하게 줄인 거라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 순간, 난 책 내용보다 박 교도관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 적어도 그들의 친구들은 서로의 인생을 저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친절한 박 교도관을 친구로 둔다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할까 상상했다.
"고맙습니다.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진시헌, 누구나 평탄한 길만 걷지는 않아. 거기서 어떻게 돌아오느냐가 문제지."
박 교도관은 다시 우리 방으로 몸을 돌려 나와 함께 걸었다. 나는 그와 내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발걸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658번은 내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그 순간, 평생 받아보지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타에게서 받은 아이들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선생님이 다시 오시는 거야?"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끌어당기며 658번이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아직 나를 보러 와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수학 시간에 열심히 보여주셨던 수학 선생님의 그래프가 눈에 어른거렸다. 두 개의 축이 맞물리는 부분에서 상향 곡선으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 이곳에 있는 우리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한없이 마이너스 쪽으로 추락하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어쩌면, 내게도 다시 출발할 수 있는 두 개의 축이 맞물리는 0, 바로 그 지점에서라도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 아니 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더 솔직히 말하면 출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죄책감과는 별다른 감정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희망 같은, 꿈속에서도 상상해 보지 못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한 번도 적지 않았던 공책에 오늘의 생각을 적어나가기로 했다. 수학 시간에 엎드려 있을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수없이 많은 점들이 이어져 그래프의 선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눈에 남을 수 있는 증거들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내가 하루를 살았다는 증거, 그것들을 모아서 다시 출발점에 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