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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Aug 15. 2022

칭찬 스티커를 모으는 기분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53일째

8월 15일 월요일 더위가 가시는 바람


지금 나에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긴 고민 없이 '밥 먹이기'라 답할 것이다. '먹고 산다'라는 표현처럼 먹는 것은 사람이 사는 데 필수불가결이자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 아무리 말 잘 듣는 아이, 똑똑한 아이라도 할 것 없이 부모 속을 썩이는 부분이 바로 이 먹는 문제다.


사실 지금 둘째는 아직 분유 밖에 먹을 수 없고, 시간 맞춰 양 맞춰서 주면 흡입하듯이 순식간에 빨아들이고 있어서 먹는 걸로는 문제 될 게 없다. 뭐 신생아 때부터 분유 건 모유건 잘 안 먹고 애를 태우는 아기들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적어도 우리 첫째와 둘째는 다 분유 까지는 늘 잘 먹어주었다.


그러나 첫째와는 식사시간은 늘 전쟁이다. 분유 다음에 이유식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주면 무엇이든 맛있게 잘 먹었지만 점점 자라면서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됐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밍밍한 분유만 먹던 아기한테는 흰 쌀 죽도 달콤한 신세계였겠지만, 각종 과자와 젤리와 양념 맛을 다 아는 지금은 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기준도 까다로워지고 자기만의 호불호가 이것저것 생길 수밖에는 없다. 게다가 다섯 살 남자아이 특유의 산만함으로 밥 먹는 시간에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딴짓을 하니 부모로서는 이 시간이 인내심 테스트나 다름없다.


오늘 광복절 연휴를 맞아서 특별히 우리 부부가 첫째만 데리고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부모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랜만에 세 식구끼리 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동생에게 엄마 아빠를(특히 엄마를) 빼앗기는 시간 없이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인지 첫째는 말도 잘 듣고 귀여움을 발산하며 나무랄 데 없는 매력을 뽐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만큼은 결국 다시 엄마 아빠가 또다시 엄포를 놓거나 윽박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거기다 하필 옆 테이블에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어떤 비슷한 또래 여자아이는 엄마랑 둘이 와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기 먹을 양만큼 얌전히 먹고 나가는 동안 우리는 첫째와 실랑이를 계속하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밥 먹을 때만 유독 말을 더 안 듣고 힘들게 하는 첫째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 전부터 아내가 도입한 것이 있는데 바로 '칭찬 스티커'다. 일명 '냠냠 대장' 스티커인데, 정해진 식사시간 규칙을 잘 지키고 밥을 골고루 잘 먹으면 하나씩 붙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0개를 다 모으면 상을 준다. 사실 밥 먹는 건 당연히 잘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걸로 보상을 주는 것이 아주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오죽했으면 이런 것까지 만들었을까. 그래도 나름 효과가 있어서 이 칭찬 스티커가 생긴 이후로 첫째는 전보다는 확실히 밥을 잘 먹게 됐다. 10개를 다 모아서 선물도 한번 사 주었더니 더 효과가 좋아지고 있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아내가 갑자기 자기도 칭찬스티커를 만들었다. 무슨 '스트레칭 대장' 스티커래나 뭐래나. 스트레칭을 잘하면 자기만 좋은 건데 그걸 한다고 스티커를 붙여주고 심지어 20개를 모으면 자신을 위한 선물을 준단다. 아니 애를 잘 훈육하기 위해 만든 걸 나이 마흔이 다 된 어른이 흉내 내서 뭐하는 것일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하기 싫거나 힘든 걸 하기 위한 동기부여를 인위적으로 더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첫째의 '냠냠 대장' 스티커와 유사한 효용 가치가 있긴 한 것 같다.


오늘 광복절 기념 마실을 다니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길래, 마침 나도 칭찬 스티커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인내심 대장' 스티커다. 사실 나는 평소엔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자 아빠라고 자부하지만, 종종 기분이 안 좋을 때 뭔가가 확 틀어지면 빽 하고 짜증이나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요즘엔 잠이 부족해서 아내에게 자주 욱 하기도 했고, 첫째에게는 거의 밥 먹을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반 협박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화를 낸 이유야 어찌 됐건 다 핑계고 그냥 인내심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 스티커를 만들겠다고 하자 아내와 첫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실은 인내심을 더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장난은 아니었다. 어젯밤 아내가 말해준 것인데, 첫째가 밤에 자기 전에 대화를 할 때 아빠가 화내는 게 너무 무섭고 싫다고 했다는 거다. 평소에 같이 시간도 즐겁게 잘 보내고 허물없이 친구 같은 아빠와 아들로 지내고 있다고 믿고 있던 마음에 살짝 기스가 났다. 어쨌건 아빠가 이제 스티커를 받기 위해서라도 화를 안 낼 거라고 생각하는지 저녁에 집에 와서 첫째에게 뭔가 혼내듯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얘가 내가 지금까지 하던 대로 나한테 말한다.


"아빠 이러면 오늘 인내심 대장 스티커 못 받을 걸~"


물론 아빠가 그 스티커 받고 싶어서 애를 훈육하고 따끔하게 가르쳐야 할 때도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스티커를 계속 모은다면 좀 더 도량이 넓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상으로 다른 건 필요 없고, 첫째가 나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상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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