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게 왜 그리 억울해?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57일째

by 디내누

8월 19일(금) 비


방금 육퇴하고 왔다. 아... 정말 탈곡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오늘은 첫째에게 탈탈 털렸다. 집에 온 6시 30분부터 잠에 든 10시인 3.5시간 동안 1.5 시간은 징징대고 떼를 쓴 것 같다. 총 떼를 쓴 횟수는 세 번.


첫 번째는 그림을 그리는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엄마한테 도와달라길래 도와줬더니 자기 머릿속이랑 달랐는지 그걸 갖고 떼를 썼다.


"나는 네가 아니라 네 생각을 모른다. 말로 알려줘야 해."


요즘 내가 첫째에게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럼 말로 표현하려고 애는 쓰는데, 자기 생각대로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스스로 답답해한다. 횡설수설하는 말을 들으며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면 또 떼를 쓴다.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설명하길래 그럼 그렇게 해보라고 하니 또 울고 불고 했다. 더 이상은 놀이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담담히 방에 가서 좀 진정하고 쉬어 보라고 했다.


방에 가서 이불 붙들고 잠시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더니 방에 있는 세계지도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뒤에 조용히 앉아 "엄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퍼즐 하다가 너무 힘들면 그만해도 돼"라고 하니, 예쁘게 "알았어"라고 했다. 그때쯤엔 완전히 마음이 괜찮아졌나 보다 했다.


문제는 치카를 하기 전 생겼다. 첫째는 치카를 한 뒤 우유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자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아까 저녁을 먹으며 첫째가 우유를 세 컵이나 벌컥벌컥 마시는 바람에 우유가 떨어졌다. 첫째는 이제 우유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유가 없으니 대신 물, 두유, 사과주스 중 원하는 걸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른 건 다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유를 구할 수 없으니 아쉬워도 좀 참아보라고 했다. 어떻게 참냐길래 "꾹 참으라"라고 했다. 내 답변이 내가 생각해도 웃긴 것 같아서 "물을 마시면 좀 나아질 거야"라고 했다. 그렇지만 첫째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울어댔다.


첫째 울음의 다음 단계는 치카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게 억울한 것이었다. "왜 잠을 자야 해? 나는 잠자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게 느껴져. 너무 싫어.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엉엉 울면서 첫째는 잠자는 게 싫다고 했다. 나는 좋은 말로 타이르다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엄마 참고 있다"라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왜 우유없어' -> '어떻게 아침까지 기다려' -> '밤이 너무 길어' -> '왜 자야해'의 무한반복으로 이어지는 첫째의 아무말 대잔치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엔 화를 내고야 말았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또 굳이 다른 아이와 첫째를 비교했고, 내가 얼마나 참았고 네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아빠까지 육아휴직을 하고 동생을 돌보고 그러면서 엄마인 내가 너와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 왜 말도 안되는 떼를 쓰는지 첫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 했다.


내가 화난 걸 눈치챈 첫째는 점점 눈물을 참고 말을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난 너무 답답했다. 왜 내가 화를 내야만 멈추는 걸까. 내가 첫째를 이해하면 이해하려고 할수록 첫째가 나의 인내심을 이용하는 것 같아 나도 기분이 많이 상했다. 다섯 살 아이와 이러고 있다는 게 스스로 한심했다.


둘이 그러고 있을 때 아빠가 둘째를 재우고 들어왔다. 애기를 재웠는데도 애기 울음소리가 나서 당황했다고, 왜 우냐고 의아해해서 우유가 먹고 싶은데 우유가 없어서라니까 아빠가 우유 한 컵을 갖고 왔다. 냉장고에 첫째가 남긴 우유 반컵이 컵 째 들어있었던 거다. 첫째와 난 둘 다 마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 둘 다 지금까지 뭐한 거지?


첫째는 그저 억울했던 것 같다. 사실 첫째는 오늘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피곤했고 피곤함을 느끼는 그 사실 자체가 엄청 싫었던 것 같다. 본인도 졸리고 잠은 자야겠는데 놀고는 싶고, 시간은 가고, 우유는 먹고싶은데 내일이 돼야 먹을 수 있는데 그러려면 잠을 자야 하는데 자기는 싫고 밤은 길다.


얘야.. 크면 더 자고 싶어도 못 자. 잠이 얼마나 좋은 건데... 첫째를 달래는 내내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고 나중엔 화도 나서 결국 입 밖으로도 말했지만, 아이의 잠투정에 내가 오늘 또 별 쓸데없는 얘기까지 했던 것 같아 스스로 민망하다.


정서적 금수저를 만들어주겠다고 바로 24시간 전에 다짐했는데,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럴 땐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일까. 세상에 오은영 박사님이 100명쯤 있어서 궁금한 점은 카톡으로 물어보고 싶다.


떼를 쓰기도 했지만 첫째는 오늘 여러 가지 예쁜 행동도 했다. 밥도 잘 먹었고, 내가 책을 읽을 때 옆에서 귀엽게 쳐다보기도 했다. 거실을 나가다가 내 발에 걸려 마룻바닥에 넘어졌을 때 씩씩하게 잘 일어나고 별로 안 아프다고도 했다. 나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뜬금없이 편지도 썼다.


아이는 오늘도 나에게 행복과 시련을 주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아들아…오늘 너가 자라는만큼 매일매일 나도 자라면 좋겠다. 우리 같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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