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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17. 2022

거짓말 같은 시간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24일째

7월 17일(일) 날씨 좋은 듯


오늘은 퇴실 교육을 받았다. 퇴실은 수요일 아침이지만, 내일 퇴실하는 다른 산모가 있어서 미리 같이 받았다. 원장실로 호출된 우리는 세장짜리 프린트지를 받았다. 모유수유부터 목욕, 영아산통까지 빼곡하게 신생아 키우는 법에 대한 매뉴얼이 적혀있었다. 물론 육아서의 정석이라 불리는 <삐뽀삐뽀 365>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핵심 요약본을 받아보니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이 조리원은 참 신기한 곳이다. 좋은 듯 좋지 않다. 가성비는 좋지만 가심비는 좋지 않다. 다시 조리원에 올 일이 생긴다면 (그럴 일은 물론 내 인생에 더 없다) 절대 오지 않을 거고, 누가 간다고 해도 추천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 조리원에서의 시간이 싫진 않다. 이 안에서 내가 한 생각들이 나를 성장시켰고, 끊임없는 수유, 유축, 모자동실을 소화하며 틈틈이 챙겨봤던 유 퀴즈 온 더 블록 재방송들이 좋았다.


소설에서는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이 있다. 곰곰이 보면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순간이 입체적이다. 이 조리원도 입체적이다. 청소부가 남자라 처음엔 경악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니 뭐니 했다. 하지만 남자 청소부가 청소를 하는 탓에 청소 시간만 되면 산모들이 거실에 모여 친해질 수 있었다. 청소부가 여자였다면 청소를 해도 다들 그냥 방에 있었을 거고, 그렇담 이 조리원에 온 다른 이들과 내가 같은 시간, 한 곳에 모여 수다를 떨 시간 같은 건 아마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 남자 청소부가 청소를 참 잘한다)


며칠 전에 이런 일도 있었다. 출산 전 집 정리를 하며 당근에 판매할 물건들을 몇 개 내놨었다. 아무 연락이 없어 실망하던 차에 갑자기 물건 두 개를 사겠다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연락을 해왔다. 첫 번째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은 거래 10분 전까지도 연락이 안 되길래 속으로 엄청 욕을 했다. 두 번째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은 거래 전 너무 예의 바르게 연락을 해왔고 매너가 좋길래 나도 친절하게 대했다.


첫 번째 사람은 결국 거래에 좀 늦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에게 그렇게 문제 되진 않았고 (나는 조리원에서 연락책을 담당하고 있었고, 거래 현장엔 남편이 나갔다) 매너 있는 사람이었으며 거래는 잘 성사됐다. 두 번째 사람과의 거래에는 오히려 우리가 조금 늦었다. 남편이 첫째도 돌보다가 부피가 큰 물건을 갖고 내려오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사람은 왜 이렇게 늦냐며 당근 채팅으로 계속 나를 닦달하며 엄청 쪼아댔다. (한 5분도 안 늦은 거였다...)


내가 그들에게, 또 그들이 나에게 주고받는 인상이 1분 간격으로 순간순간 오묘하게 변화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훈훈한 거래 후기로 마무리됐지만. 아마 그들도 나에게 그랬을 거다.


오늘 난 유튜브에서 유희열의 표절 시비 영상을 여러 개 봤다. 기사로 접하긴 했지만 표절 의혹을 받는 노래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유희열이라는 뮤지션과 토이 음악을 좋아했기에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의혹이라고 하기엔 너무 명백하게 닮은 음악들이었다. 팬에서 안티팬으로 돌아선 많은 이들의 댓글도 읽었다. 학창 시절에 토이 앨범과 함께했던 무수한 시간들이 이젠 그의 노래 제목인 '거짓말 같은 시간'이 돼버렸다는 이들이 많았다.


살아가면서 매일 느끼는 내 주관적인 인상과 평가를 너무 과신하지 말아야 될 것 같다. 세상을 알 수 없고, 나이 들수록 확신의 순간은 줄어든다. 그러니 말도 조심하자. 특히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남을 쉽게 평가하거나 헐뜯는 걸 조심해야겠다.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산다는 것도 그렇겠지. 그래서 말은 무거워야 하고, 귀는 열어야 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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