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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17. 2022

어디까지 갔다 오는 거야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24일째

7월 17일 일요일 소나기


첫째 아이와 실내 수영장에 가기로 한 날이다. 한두 달 전에 호텔 수영장을 대체할만한 장소를 찾다가 아내가 발견했던 곳이고 그날은 나 혼자 2시간 정도만 짧게 다녀왔었다. 그냥 아파트 단지 상가 지하에 있는 곳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퀄리티다. 비싸고 뭔가 고객에게 상냥하지 않은 운영정책들이 곳곳에 으름장을 놓듯이 쓰여있고 직원들도 불친절하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는 희소가치가 있는 대체 불가 장소다. 그리고 이곳이 여전히 재방문 의사 200%인 이유는 첫째가 물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첫째의 태몽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내가 평생 꾼 꿈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인셉션> 엔딩에 나올 것 같은 약간 이국적인 바닷가에 있는 어떤 동네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혼자 바다로 갔는데, 어느새 고래 등에 타고 있었다. 고래 종류는 잘 모르지만 돌고래만 한 작은 크기는 아니고 그렇다고 집채만 한 흰 수염고래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래도 검고 크고 꽤 넓은 고래 등에 타서 신나게 바다 위를 떠다녔고 들뜬 마음으로 바닷바람을 맞다가 꿈에서 깼다. 이렇게 첫째의 태명은 고래가 됐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첫째는 갓난아기 때부터 물을 정말 좋아했다. 그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데, 예를 들면 호텔 수영장에 가서도 발도 안 닿는 깊은 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어른들이 붙잡으면 손을 뿌리친다. 무슨 수영 영법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물에 떠서 발장구를 치며 조금씩 움직이기도 한다. 평소에 다른 것을 할 때는 겁이 많은 편인데 수영장에서만은 예외다.


이 수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째는 미끄럼틀이나 물놀이 시설이 있는 놀이터 같은 공간보다는 출발과 도착지점이 있는 수영 트랙 같은 곳을 좋아했다. 오늘은 제법 엎드려서 뒤로 발장구도 치고 배영까진 아니지만 누워서도 가고 전에보다 더 향상된 모습이었다. 제대로 된 수영을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흡수할 것 같다. 5살밖에 안됐는데 동네 키즈 수영장을 벌써 알아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사실 모든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천재인 줄 알다가 점점 현실을 깨닫는다고 한다. MBTI에서 N의 성향이 강한 나는 여기에 한술 더 떠 머나먼 곳까지 행복 회로가 가동된다. 수영하는 걸 보다가 이런 상상이 시작됐다.


<한국의 마이클 팰프스 '프리윌리' OOO, 2036 올림픽 금메달!> 온라인 뉴스 헤드라인은 이렇게 도배되고, 우리 아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프리윌리라는 별명은 그냥 고래니까 내가 맘대로 붙인 것이다. 마린보이니 뭐니 이런 이름을 잘 붙이니까. 어떤 기자는 나에게 이런 아들을 키운 것에 대해 인터뷰를 한다. 내가 태몽을 고래 꿈을 꿨고 얘가 어려서부터 수영장에 환장을 했다느니 뭐 이런 내용이다. 올림픽 금메달이면 병역 면제니까 잘 됐다고 생각하다가 그즈음에 열리는 하계올림픽에 서울-평양 공동 개최를 도전한다는 뉴스를 봤던 것이 떠올랐다. 이러다 남북 평화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이 아닌가. 홈 어드벤티지가 있으니 실력만 있다면 더 유리하겠군. 근데 2036년이면 14년 후니까 19살이면 올림픽 금메달 따기엔 너무 어린가.


황당한 걱정까지 다다른 끝에 현실로 돌아왔다. 물론 무슨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처럼 한참 멍하니 이런 공상에 빠져있는 건 아니다. 물에서 애랑 놀아주는데 그러면 큰일 난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저기까지 다다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째 아이는 저곳에서 4시간이나 있었다. 물론 4시간 내내 수영만 한 건 아니고 중간에 밥도 먹었고 마지막에는 옆에 붙어있는 키즈카페 놀이공간에서 놀기도 했다. 어쨌건 그쯤이면 무조건 집에 오는 차에서 뻗어서 잘만도 한데, 쌩쌩하다. 오후 4시쯤인데 생각보다 많이 덥지 않기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이 녀석은 나랑 각자 자기 자전거를 타고 공원까지 갔다 오는 걸 좋아한다.


이쯤 되니까 체력이 방전됐다. 나만. 저녁을 짜파게티로 대충 때우고 그래도 오늘은 피곤하니까 일찍 자겠지 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9시가 넘었다. 대체 엄마도 아빠도 체력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닌데 얘는 누굴 닮았을까?


겨우겨우 불을 끄고 같이 누운 뒤 나는 이번엔 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같이 잠들면 오늘은 끝이다. 혼자만의 밤을 조금이라도 즐기고 일기도 쓰려면 무조건 버텨야 한다. 다행히 강철체력 첫째도 금세 수면모드로 진입하는 듯하다. 잠깐 둘째 생각을 한다. 얘는 사주가 오빠보다 더 큰 인물이 된다고 했는데. 선거에 나가는 상상을 한다. <대한민국을 바꿀 '신의 한 수' OOO!> 이름이랑 라임을 맞춰서 내 맘대로 지었다. 그땐 신의 한 수라는 말이 구닥다리가 되려나. 아 그게 아니라 신의 한 수라는 정치 유튜버가 있던 것 같은데 안 쓰는 게 낫겠구나.


대체 어디까지 갔다 오는 거예요 아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잠들 뻔했다. 첫째는 그사이 이미 새근새근 숨소리만 내고 있다. 야식을 주문할 거다. 이번 주말 고생한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내일은 내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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