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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26. 2022

미워하는 마음 없이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33일째

7월 26일 화요일 맑음


예전 일기에서 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가에 대하여 쓴 적이 있다. 그때는 '토요일을 기다리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표를 바꿔야 할 것 같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오늘은 첫째의 방학을 맞이하여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롯데월드를 갔다. 유치원 다른 친구들은 해외여행도 가고, 바다나 좋은 곳에 다들 놀러 갈 텐데 신생아 동생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안쓰러워 이번 주에 그나마 함께 다닐만한 곳과 일정을 생각해두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셔서 둘째를 봐주시고 동생이 태어나기 전처럼 엄마 아빠와 첫째만 셋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회사와의 갈등으로 생긴 감정이 하루 종일 나의 마음을 짓눌렀다. 아침부터 고용노동부에 전화 상담을 했는데 내가 부당한 처우를 당한 것이 맞다는 의견이었고 정식으로 회사에 이의제기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임금체불 신고 접수를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다녀온 회사이고 앞으로 6개월 휴직 기간에도 출근은 안 하지만 소속은 그대로인데. 그런 조치까지 하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할지 고민은 내 몫이고 하기로 한 것은 해야 했다. 둘째는 먹고 자고만 잘하면 비교적 손이 많이 안 가는 타입이라 부모님께 분유 포트나 중탕 기계 등의 설명을 해드리고 언제 먹이면 되는지 알려드렸다. 문제는 첫째였는데, 이 녀석은 일단 롯데월드에 가본 적이 없어서 거기가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왔으니까 같이 놀면 재미있을 텐데 왜 다른 데를 가냐는 거다. 출발 전부터 한참 설득과 실랑이를 하고 현관을 나와서도 떼를 쓰는 걸 겨우 가라앉혀서 롯데월드에 도착했다.


일단 롯데월드에 들어가니 아이는 놀이동산 특유의 아우라에 압도된 듯 빠져들었다. 평일 낮인데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초, 중, 고, 대학교가 다 방학이라 그런 듯하다. 눈치게임 실패다. 그래도 휘황찬란한 볼거리와 시설들이 가득하고 적당히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며 방방 뛰는 모습에서 출발 전에 안 간다고 했던 애는 온데간데없었다. 일단 어린이라면 롯데월드에 발을 들이는 순간 홀릴 수밖에 없다. 처음이니까 더더욱.


나도 결혼 직후 즈음에 왔던 것이 마지막이라 오랜만에 온 롯데월드가 마음에 들었다. 대략 5~6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거나 새로 생겼고, 그 전에는 근처도 가지 않았던 키즈 놀이기구가 몰려있는 구역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지라 꽤 신선한 기분이었다. 반면에 여전히 그대로인 것들도 많았다. 한쪽 귀퉁이를 차지한 놀이동산 양대산맥 바이킹과 후룸라이드도 그랬고, 비명을 지르며 스쳐 지나가는 후렌치 레볼루션도 그랬다. 부모님과 함께가 아니라 친구들과 처음 왔던 중2 때 고등학생 일진에게 가져온 돈을 다 빼앗겼던 기억도 났다. 당시엔 꽤나 무섭고 힘들었던 순간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다 추억이다. 우리 아들은 언제 여자 친구와 롯데월드에서 데이트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딸내미는 남자 친구가 없을 예정이니까 예외다.)


그렇지만 나와 달리 아내와 첫째는 롯데월드가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둘의 기분은 죽 끓듯 자꾸 급변했다. 아내는 아무래도 아직 산후조리 중인데 새벽에 잠도 충분히 못 잔 상태에서 롯데월드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지치고 힘든 것 같았다. 첫째는 놀이기구를 탈 때는 신나다가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힘들고 지루해했다. 우리 셋은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분위기보다는 옥신각신 예민한 시간이 더 많은 상태로 오후 내내 롯데월드를 배회했다. 그나마 후반부에는 키즈 놀이기구 존에서 재미난 것들을 연속으로 타면서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고, 내친김에 다트 뽑기로 자그마한 고리 달린 인형도 2개 뽑아주었다.


한편 내 머릿속은 이 와중에도 틈 날 때마다 회사 생각과 싸워야만 했다.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회사나 담당 임원에 대한 불만과 미움으로 형상화됐다. 아예 내 선에서 일단 매듭을 지어놓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위하여 핸드폰 메모장에 고용노동부 상담 내용을 근거로 회사에 보낼 메일을 미리 써놓기까지 했다. 그래도 머릿속은 비워지지 않았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팬시브'가 나에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팬시브'는 어떤 기억이나 생각을 머리에서 끄집어내어 따로 보관하는 세숫대야 같은 그릇이다. 나같이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롯데월드에서 집에 오는 길에 아내에게 결국 속내를 털어놓았다. 원래의 나는 부당한 걸 당하면 절대 못 참는 성격이다. 하지만 그간의 사회생활 경험으로 이번에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컸다. 아내는 내가 앞으로 대처할 방식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눈 것 중에 '그대로 두기'를 추천했다. Let it be.


전에 어디선가 본 내용인데,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생각을 할 때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내가 휴직 후에 약 1달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이유는 시간이 여유롭고 토요일에만 할 수 있던 것을 평일에도 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안 다니면 확실히 그만큼 누군가를 미워할만한 상황이 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브런치가 나만의 팬시브가 되었으면 한다. 적어도 남은 6개월의 휴직 기간 동안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최대한 갖지 않으며 살고 싶다. 나중에 꺼내 들여다볼 일이 있더라도 당분간은 그러고 싶다.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아깝다. 거기에다 내 기분이 태도가 되어 회사의 문제와 관계도 없는 가족들에게 불편한 공기를 만들기도 싫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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