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동굴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48일째

by 디내누

8월 10일 수요일 비 그침


나는 각종 SNS 매체에서 광고하는 마법 같은 육아템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요즘 부쩍 인스타 피드에 뜨는 이탈 방지 베개라든가, 각종 블로그 마케팅의 결과물로 추측되는 육아 아이템들도 다 상술이라고 생각한다. 잘 믿지 않지만 만세 부르고 자는 자세를 유지해주는 ‘기적의 속싸개’라는 스와들업에 두 번이나 낚였고 뒤통수를 둥글게 해 준다는 각종 베개가 집에 5종류나 있는 건 비밀이다. 어쨌든 난 마케팅에 다신 속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대단한 아이템을 발견했는데 바로 조명 기능이 포함된 신생아 백색소음기다. 참고로 아기들은 아주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할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청소기나 드라이기 같이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 좋아한다. 엄마 뱃속에서 이런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났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걸 백색소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산 백색소음기는 여러 종류의 백색소음을 틀 수 있는 스피커인데 취침등 기능도 있는 것이다. 사실 마케팅에 잘 휘둘리지 않는 나지만 이 백색소음기는 어차피 취침등이 필요했고 매일 핸드폰으로 자장가를 들려주는 것도 번거로웠던 참에 크게 부담 없는 가격이라 구매를 결정했다. 이건 절대 광고나 협찬이 아니고 제품 설명과 후기도 대충 읽어보고 큰 기대 없이 산 내돈내산 제품이다.


며칠간 쏟아진 폭우를 뚫고 무사히 배송이 도착해 바로 사용해봤다. 근데 일단 보통 신생아 백색 소음계의 대명사인 쉬- 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소리들도 백색소음이 아니라 무슨 파도소리, 물 흐르는 소리, 천둥소리, 새소리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다. 아 이거 또 낚였네. 짜증이 살짝 났지만 그래도 후기가 다 거짓말은 아닐 테니 속는 셈 치고 써보기로 했다. 일단 둘째가 목욕 후에 조금 졸려서 칭얼댈 때 각종 소리를 종류별로 다 틀어줘 봤다. 파도소리, 물소리... 의외로 울음이 그치고 반응이 괜찮았다.


'천둥소리... 이딴 건 대체 왜 있는 거지... 물 떨어지는 소리... 이건 그냥 바람소리고... 이건 자장가네...'

이렇게 10종류의 소리를 계속 넘기고 있는데 둘째를 다시 보니까...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우리 둘째는 졸릴 때는 재우기 어렵지 않은 편이라 그냥 많이 졸렸나 보다 했지만 그래도 쓸만한 아이템인 듯했다.


하지만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은 바로 밤잠을 재울 때였다. 반응이 가장 좋았고 어른이 듣기에도 거슬리지 않는 물 떨어지는 소리를 틀어놓고 재운 시간은 9시 반쯤. 8시에 분유를 먹였으니 11시 정도면 일어날 시간이다. 깨는 소리가 나면 바로 갈 준비를 하고 브런치를 쓰고 있는데 일어날 기색이 없다. 일기를 다 쓰고 아내와 오랜만에 유튜브 콘텐츠를 시청하고 있는데 12시가 넘어도 안 일어난다.


대체 어떻게 자고 있나 둘째를 재우는 안방에 들어가 봤다. 참고로 신생아는 체온이 높고 조금만 더워도 태열이나 피부 트러블이 생기기 쉬워서 24도를 유지해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부는 안방에서는 너무 추워서 못 자고 안방과 첫째 방의 중간에 있는 거실로 쫓겨난 상태다. 안방의 상태는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한 공기, 밖에는 계속 비가 내려 습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깜깜하고 물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한 곳. 엥 이거 그냥 동굴이잖아? 내 귀에 도청장치도 아니고 우리 집 안방에 동굴 소리가. 둘째는 동굴 속에서 잠에 취해 있었다.


먹은 지 5시간이 넘은 1시 10분쯤에서야 살짝 우는 소리가 났다. 동굴 같은 방에서 분유를 먹이니까 곧 다시 잔다. 다시 소리가 나서 깬 시간은 새벽 4시 20분. 그런데 가보니 조금 끙끙대지만 여전히 잠에 취해있다. 딸꾹질을 하면서 소리가 났던 것.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모자를 씌우고, 풀어지고 약간 목 주변이 축축해진 속싸개를 새 걸로 갈아주는 동안에도 그냥 자고 있다. 아마 꿈에서 동굴 탐험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신생아 시기가 지났으니 밤잠을 잘 땐 깨서 달라고 하지 않으면 굳이 먹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시 재우고 나도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엔 확실히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가 나서 깨서 보니 6시 10분. 마지막으로 먹은 지 5시간이나 지났다. 먹고 또 잔다. 이건 마법... 아니 기, 기적이다.


한여름밤의 꿈같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까 하는 우려는 오늘로 사라졌다. 오늘 낮에도 졸려할 때 이걸 틀어주면 잠드는 데까지 5분 컷이었다. 등센서? 안아달라? 그런 거 없다. 그냥 누워서 소리 좀 듣다가 잔다. 오늘 오후에는 파도소리를 틀어놨는데 낮잠을 무려 3시간이나 잤다. 어제까지 낮에는 30분씩 쪽잠을 자던 아기가 맞나? 아내와 협의해 낮잠 잘 땐 파도소리, 목욕할 땐 물소리, 밤잠 잘 땐 동굴 소리를 틀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오늘 밤. 바로 지금이다. 오늘도 제대로 밤잠을 자기 시작한 건 어제와 비슷하게 대략 9시 넘어서였다. 마지막으로 먹은 건 7시 반. 지금은 3시간이 지났다. 원래 낮에는 꼬박꼬박 3시간마다 먹고 있지만 지금은 밤이다. 가보니까 동굴에서 잘 자고 있다. 그래 밤에는 자는 거야 원래. 밤은 길어 더 자 아가씨야...^^


이전 24화포기하면 종료시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