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딘닷 Dec 11. 2020

[딘닷의 남한유랑기 #1] 전라남도 목포 (2)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다

올해의 첫 여행다운 여행의 아침 해가 밝았다. 다행히도 날씨가 맑았다.

춘화당에서 조금 떨어진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 놨는데 주차장 옆 식당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창 트로트가 대세였던 시기라 송가인이 소주 광고로도 열일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회 배달 시킬 때 왔었던 소주가 잎새주였다.)


잎새주에서 새삼 지역주의의 중요성을 깨닫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쭉 살다 보니 소주하면 '참이슬/진로, 처음처럼'에 익숙하고 지역별로 소주가 있다는 것과 부산에서는 시원 소주가 대세라는 말은 들었지만 전라남도는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보니 '잎새주' 광고가 생소하게 다가왔다. 


이 참에 지역별 소주를 알아보고 솔직히 좀 놀랐다.


"우와... 지역별로 이렇게나 다양한 소주 브랜드가 있구나" 

'남한유랑기' 연재 인트로 글에서 왜 한국은 어딜 가나 지역 색채가 상대적으로 옅고 음식도 비스무리한 지에 대해 잠깐 언급했었는데, 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지역 소주가 있긴 하지만 전국 어딜 가도 참이슬, 처음처럼은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는데 여기에서도 서울에서 먹었던 것을 (적어도 나는) 먹고 싶지 않다. 뭔가 이 지역만의 맛과 풍미를 즐기고 싶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문화 관광 사업에 있어서의 지역주의에는 적극 찬성한다. 그 지방만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것들을 더 많이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멀리 여행을 떠난 이유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일상을 보내는 곳과는 차별화된 무언가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게 크다. 


잎새주의 캐치프레이즈가 '우리동네'인 것도 이러한 지역부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겠지. 자고로 '우리동네'에 오면 맛봐야 하는 소주올시다~ 이거여~


사실 위와 같은 소주들은 산업화 이후 대중들이 싼 값에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소주들이고, 원래 한국에도 지역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빚은 술이라고 하여 '가양주'가 대세였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하우스 맥주니 홈 브루잉이니 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단속으로 이런 알딸딸하게 아름다운(?) 지역주 풍습이 사라진 게 참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관련된 얘기는 포천 산사원 편에서 별도로 다뤄보겠다.)



전라도의 아침상


모름지기 여행할 때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지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법!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차를 세워두고 근처 맛집을 검색하다 보니 #명인집 에 대한 추천이 많았다. 

사진만 봐도 아주 깔끔해 보였고, 무엇보다 전통 문화를 사랑해서 한옥이면 사죽을 못 쓰는 나 '딘닷'에게 이 식당은 다른 곳과 차별화된 경험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숙박도 한옥에서 했구먼!)


1979년 개업해 2016년 전라남도의 '남도음식명가'로도 지정된 명인집

아침이라 그런지 우리가 거의 첫 손님이었다. 

신발을 벗고 식당 안으로 드니, 마룻바닥은 근대식 목재 바닥이었고 서까래는 꽤나 전통적인 스타일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영업 세팅을 깔끔하게 마치고 경쾌한 fm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식 메뉴가 따로 있었는데, 우런간국(간국이란 '간이 된 국'을 뜻한다고 함), 가시리된장국, 홍오애국('애'는 내장의 전라도 방언 정도 되는 것 같음), 조기조림이 있었는데 죄다 생소한 메뉴들이어서 나는 그 중에 첫 메뉴로 나와 있는 우럭간국을 그리고 친구는 메생이국을 골랐고 거기에 코다리를 하나 추가했다.


원래 모름지기 처음 방문한 가게에서 뭘 먹을 지 잘 모르면 나는 첫번째 메뉴를 시키는 편이다. 그게 그 집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는 시그니쳐 메뉴이기 때문!


밑반찬이 깔렸는데 벌서부터 때깔이 다르다. 특히 젓갈이 완전 밥도둑!!

과음은 아녔지만 어제 마신 소주 해장에 그만이었던 우럭간국!

우럭간국 (좌) / 메생이국 (우)

밑반찬 깔린 이후에 이게 떡 나오길래, 이게 코다리인가 보다 하고 먹었는데 맛이 어째 고등어 같더니...해서 물어보니 이건 고등어가 맞다고 ㅎㅎ (근데 고등어구이가 밑반찬으로 나오는 클라스 보소...ㄷㄷㄷ)

이게 코다리였는데 이렇게 고퀄의 코다리가 3000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이름값은 톡톡히 해서 엄청 꼬들꼬들하고 맛있었다!


여행의 스타트가 참 좋다.

100년 된 전통가옥 게하에서의 하룻밤과 40년된 전통가옥 식당에서의 첫 끼.

목포에서 아침식사하실 분들에게 강추!

그야말로 정갈하기 그지 없었던 명인집에서의 아침식사

타임머신을 타고 근대기 목포거리를 걸어본다


식사를 하고 나서 소화 겸 근대문화역사공간 주변을 걸어보았다.

얼핏 보면 일제강점기 또는 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 마저 줄 정도로 거리 곳곳에 근대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사람도 없고 아침식사를 하는동안 구름도 껴서 살짝 쓸쓸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코너에 위치한 '사슴수퍼마켙'이 눈에 띄었다. 

무안군청 공무원으로 일하시던 할아버지가 노후를 위해 만든 수퍼마켓으로 할머니가 72세까지 운영하시다가 문을 닫은 이래, 현재는 옛 사진들을 전시한 작은 전시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슴은 노부부께서 좋아하던 동물이라고... 요란한 이름이 아닌 노부부의 소박한 애정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수퍼마켓을 '마켙'으로 적은 데서 레트로 분위기가 뿜뿜!


왠지 그 때 그 시절 '수퍼마켙' 앞 저 평상에 앉아 수다를 떨었을 법한 동네 주민들이나 꼬맹이들 무리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세월의 떼가 묻혀진 하얀 나무틀과 그 위로 주인을 잃은 먼지 쌓인 책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다. 더 이상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 라디오도 분위기를 맞춰보려는 듯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빛 바랜 담배가게 사인이 애틋하게 다가오는 건 내가 그 시대의 끝자락을 살아온 아재라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ㅠ


우리나라엔 왜 상가주택이 흔치 않았을까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집들의 대부분은 1층은 상가 2층은 주택 즉 지금으로 따지면 주상복합(?) 형태가 많은데 일본의 '마치야' 형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옥 형태는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유럽 등지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이런 전통 가옥 형태가 없었던 이유는 뭘까 예전부터 항상 궁금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가설이지만,


첫째, 한국의 전통 가옥인 한옥 또는 초가집은 2층 건물이 거의 없었다. 위로 높게 짓기 보다는 마당을 중심으로 공간을 넓게 개방적으로 짓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게다가 건축 기술적으로도 당시에는 고난이도였을지 모르고,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독특하게도 온돌이라는 난방시스템이 있었기에 2층으로 지으면 이러한 난방을 적용하기도 어려워졌을지 모르겠다.


둘째, 상업이 덜 발달해 있었다. 애시당초 이러한 '상가주택'이 생기려면 상업 및 시장이 발달해야 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조선의 신분제도는 '사농공상'. 상인이 가장 천시 받는 사회였다. 상업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경제도 낙후해서 화폐가 아닌 물물교환 방식으로, 그것도 상설 시장이 아닌 5일장처럼 간헐적으로 열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상점'이 있을리 없었다. 시장은 어디까지나 돗자리상인처럼 잠시 있었다 사라지는 것...


상설 시장이 없으니 그 안에 들어갈 상점도 없고 상가주택 형태도 자연히 없을 수 밖에... 반면 상업이 비교적 일찍 발달했던 일본이나 서양의 경우엔 사람들이 모이는 도심에 살 경우, 1층을 생업의 터전인 상점으로 쓰고 2층부터는 거주공간으로 활용하는 건축 방식이 유행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0년전 일본 에도 시대에는 1층을 식당으로 쓰고 일하는 동안 비게 되는 2층의 거주공간을 여인숙으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하니...


요즘에는 한국 도심에도 주상복합이 생겨서 목이 좋은 1층은 상가로 쓰고 윗층에는 사람들이 살게 하는 방식이 다소 흔해졌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생긴 신식 건축물이고,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상가주택(실제로 타이페이 도심엔 노후한 상가주택들이 쫙 깔려 있어 도시 개발이 지연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은 근대 일본 영향을 받은 것이 전부라는 사실에서 상업 발달이 뒤쳐질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의 제도와 사상 체계가 아쉽게 느껴졌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동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지어진 멋스러운 근대식 건물이었다. 

대체 누가 살았길래 이런 알짜배기 땅에 저런 으리으리한 집을 지었을까 했더니만 옛날에 구 목포 일본 영사관이었다고... (앞으로 계속될 남한유랑기의 뒤쪽으로 가면 서울에 대해서도 적게 될 텐데,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등 경치 좋은 노른자 땅에는 어김 없이 일본 시설들이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약탈 당한 국가에 비애란 이런 것이다.)

 

아래 사진에는 안 나와 있지만 근대역사관 양 옆으로는 쌩뚱맞게도 70-80년대 지어진듯한 5층짜리 아파트가 있었다. 체계적인 도시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지어지다 보니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보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본의 잔재들은 조선총독부처럼 다 철거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광화문과 경복궁을 가린다는 악의적인 의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면 역사의 일부로 과거를 교훈삼아 잘 가꾸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목포와 군산은 특히 일본 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이들 도시가 볼 때는 이런 것들도 (비록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베어 있긴 하지만 나름) 지역 문화 유산이고 이런 것들이 관광적으로 자신들을 차별화할 수 있는 하나의 자산이기도 하다는 측면에서 '근대역사문화공간' 구역에서는 이와 어울리는 형태로 짓는 것이 관광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우리가 방문한 날은 코로나로 실내 참관을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밖에서 사진만 남겼다. (하필이면 딱 이날까지 내부 관람 금지였다 ㅠㅠ)

이 건물은 드라마 '호텔델루나'의 촬영지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기에 실내가 너무 궁금했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근대역사관(구 일본 영사관)에서 바라본 목포 구시가지의 전경. 현재의 '근대역사문화공간'이 옛날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마을(本町, 혼마치)였고 조선인들은 주로 유달산 건너편인 북교동(춘화당 같은 한옥들이 많이 위치한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일본인 마을, 중국인 마을, 조선인 마을... 근대 개항지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듯 하다.

근대역사관 관람이 무산되고 아쉬운 마음에 뒷동산이라도 올라보자는 심정에서 역사관 왼쪽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 보며 노적봉 예술공원을 둘러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유달산으로 이어졌다. 

가게 이름에 '휴게실'이 들어가는 것도 신기하고 전화번호 적힌 것도 신기하고 전반적인 컨셉이 신기해서 찍어보았다. 옛 향기가 뿜뿜 나는 가게임에 틀림 없다.


애당초 계획에도 없었던 유달산이지만 나지막하니 빡세 보이지도 않아서 한 번 그까이꺼 올라보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 [딘닷의 남한유랑기 #1] 전라남도 목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