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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닷 Dec 12. 2020

[딘닷의 남한유랑기 #1] 전라남도 목포 (3)

유달산 아주머니의 맛깔스런 입담에 스쳐 가려던 목포에 빠져들어 버리다!

바위가 군량미로 둔갑하다 - 노적봉에 얽힌 설화


근대역삭관 뒤로는 이런 멋진 봉우리가 있다. 신기한 건 딱히 가파른 산을 오른 것도 아니고, 완만한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올라오면 떡 하니 이런 큰 바위가 보인다는 것이다.


노적봉은 명량대첩 후 우리 수군을 정탐하던 왜군들에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당시의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엉(볏짚)을 엮어서 바위를 덮어 그것이 마치 군량미를 쌓아올린 더미처럼 보이게 하여 적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멀리서 보면 거의 무슨 군량미 타워처럼 보였을 거 같은데...그거에 속는 걸 보면 심리전이 중요하긴 한가 보다.)

여행 당시에는 가이드가 따로 없어 그냥 멋진 바위네~ 하고 지나갔었는데 이렇게 여기에 얽힌 역사적 '스토리'를 아니 같은 바위도 다르게 보인다. 2018년 4월에는 이를 기리기 위한 '목표 이순신 수군문화축제'도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이러한 '스토리'를 잘 키워서 많은 축제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지역마다 활성화된 '마츠리'처럼 말이다.)



유달산에 오르지 않고 목포를 논하지 말라


유달산 입구에는 '유달산 정기'라고 적힌 큰 바위가 있다. '산' 자가 산수화에 나올법한 산처럼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목포 개항 110주년을 기념해 2007년에 세운 것이니 목포 개항한지도 어느덧 123년이나 된 셈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개항된 곳이 목포라고 하니 근대개항사에 있어 목포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노적봉 전설의 장본인, 충무공 이순신이 노적봉을 바라보고 있다.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픈 때가 있는데, 당시에 나라의 지원도 없이 거의 혼자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고민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사는 데 전혀 지장 없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현대의 내가 한 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모든 게 부족했을 상황에서도 나라님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던...

그래서 그는 역사적 레전드로 남지 않았겠는가.

이순신 장군 뒷편으로는 오포대라고 하여 유달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인데, 예전에는 이곳에서 포탄 없이 화약만 쏘아 정오를 알려주는 '오포'가 있었다고 한다. 시간을 대포로 알려주다니... 역쉬 전라도 성님들은 박력이 있당께롱.

지금은 포를 쏘지 않지만 대포만이 덩그러니 전시되어 있다. (원래 조선식 대포는 일제시대에 일본이 가져가버리고 현재 남은 건 일본식 대포라고 한다...ㅇㅇ?)

요즘도 그냥 이벤트처럼 매 정오에 한 번 쏘아주면 재밌으련만...

이 정자에 오르면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여기 오르고 나서


그저 스쳐지나가려고 했던 목포의 매력에 빠져버리게 된다.


파노라마로 찍어 본 목포 구시가지

나지막한 산인데도 저 멀리 바다까지 아무것도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저건 영산강의 하류에 해당하지만 바다의 입구이기도 하다.


그 건너편으로는 영암군의 대아산이 보인다.

강, 바다, 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뷰만큼 멋진 자연의 조합이 있을까.


최고의 지역 전문가를 유달산 위에서 만나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목포 시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아주머니가

"청년, 여행 오셨어요?"

라고 대뜸 물어보신다.

사진 요청하시려는 아주머니인가 했더니 자신이 목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도 되겠냐고 물으신다.

"아..저야 좋죠~"

라고 답하니 청산유수와 같이 또랑또랑하고 구성지게 시가지를 훑어가며 목포에 얽힌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 둘 풀어주신다.

몇 분 하시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끊임 없이 계속 이어진다.

넋놓고 듣고 있으니 20분이 금새 흘러가 있었다.

다부진 체격의 아주머니. 지역 가이드라도 되시는 줄 알았는데 그냥 좋아서 취미로 하시는 거라고... 뒷 분이 남편인 줄 알았는데 그냥 생판 남이셨다 ㅎㅎ

처음엔 흑백처럼 밋밋했던 '목포'라는 도시가 아주머니의 찰진 스토리와 함께 하나 둘 색감과 생기를 찾아가며 역동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는 혼자서 여행하면서 내 눈 앞에 펼쳐진 것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채워나가며 음미하는 걸 좋아하고, 누구는 가이드를 통해 그곳에 얽힌 스토리를 듣는 걸 좋아한다.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곳이라면 전자가 좋지만, 그냥 얼핏 봤을 때는 별로였던 곳들이 스토리를 입혀주면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후자의 케이스다. 목포의 경우는 이 후자에 해당했다.


말씀해 주신 것 중에 몇 가지 생각나는 게,

- 일본인들이 살던 구시가지는 계획 도시(마을)로서 길을 바둑판처럼 닦아 놓았는데 유독 물가 근처만 도로가 꺾이게 지어져 있었다. 이유는 물이 범람하게 되면 길을 따라 물길이 번지게 되는데 길을 한 번 꺾어놓음으로써 범람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도시 정비 측면에 있어서 나름 일본인들의 지혜가 있다고 얘기해 주셨는데 일견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사진에서 정면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 왼쪽 쯤에서 도로가 좌측 대각선으로 꺾이는 걸 볼 수 있다.)


- 산자락 바로 아래에 일본식 지붕의 저택이 보이는데 그게 현재 성옥기념관이다. 여기는 목포에서 조선내화라는 회사로 큰돈을 번 지역 유지 성옥 이훈동 선생의 일식 저택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저택과 정원도 공개하여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가이드 아주머니도 한 때는 이곳을 거닐며 명상하는 게 낙이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최근엔 관람객으로 인한 훼손으로 관람이 불가하고, 저택과 정원 외에 그 옆에 자신의 88세 생일(미수)을 기념하는 성옥기념관만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안에는 본인이 평생을 바쳐 모은 근현대 서예 대가의 작품과 한국화, 도자기 등을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긴 꼭꼭꼭꼭꼭 봐야한다고 그렇게 강조를 하셨다. (물론 여기도 코로나 때문에 하필 딱 이날까지 휴관이었다 ㅠㅠ)


- 그리고 성옥기념관 앞에 있는 '한마을떡집'이란 팥빙수 가게가 있는데 역사도 오래됐고 팥빙수가 기가 막히는 꼭 들러서 먹어보라고 권유까지 해주시더라...

목포의 보물이라며 꼭 가보라고 하셨던 성옥기념관과 이훈동 정원이 나무들로 둘러쌓여 있다.

그 다음엔 저 멀리 언덕을 가리키며, 저 곳이 목포의 달동네 지역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가 되었었다고 한다. 유달산 계단도 영화 '롱리브더킹'에 나왔다고 하며, 지금은 드라마 '도도솔솔라라솔'을 촬영중이라며 한껏 자랑을 하셨었더랬다... 오메~ 아주므니 열정이 너무 과하당께~ @@ (워~ 워~)

요즘엔 사람들이 집을 많이 비워서 실제로는 빈 집도 꽤 있다고 하셨다.

이렇게 한번 쭈~욱 목포 전반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니 볼 거리 천지였다. 그냥 스윽 거쳐 지나가려던 목포가 졸지에 정식 여행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전만 슬쩍 보고 가려했었는데 이거 시간 좀 더 써야 싶었다.

기왓지붕들과 형형색색의 양 지붕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재밌어서 찍어봤다.

아주머니는 쉬지 않고 속사포로 안내를 계속하셨는데, 어찌나 말씀을 맛깔나게 해주시던지...

목포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해서 인텔리 느낌이 물씬 났다.

왠지 모르게 외국에서 유럽이나 남미에서 유학이라도 하셨을 거 같은데 외국에서 산 적은 없고 선생님을 하다가 지금은 남편을 따라 목포에서 오랫동안 살며 이렇게 외부 관광객이 오면 목포 홍보를 하는 것을 낙으로 사신다고 했다. 무언가를 저리도 신나게 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덕업일치라고나 할까.

어찌나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던지... 그야말로 천성 이야기꾼이었다.


일본인들이 살던 동네 외에도 조선인들이 살던 북교동 동네와 우리가 묵었던 춘화당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강추하는 청춘 게스트하우스라든지 북교동성당 등 가볼만한 곳들 추천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산과 바다를 잇는 가장 긴 해상케이블카라면서 꼭꼭 타보라고 강추하셨다.

그렇게 한참을 아주머니 말씀에 홀려서 들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이거이거 볼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것 같았다.


문화해설사 수준에 가까운 로컬 사람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지만, 이렇게 단 시간에 한 도시에 대해 쭈욱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 반나절을 등산에 써야할 정도가 아닌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면, 먼저 그곳을 올라 전반적인 도시 지형이나 특색을 파악하는 걸 강추한다. 큰 그림을 보고 나면 디테일을 잡는 것도 수월해진다.  

일단 강추하신 해상케이블카를 타 보기 위해 유달산을 좀 더 타고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계단은 많았지만 경사가 완만한 편이고 등산길도 잘 닦여져 있어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금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나이 드신 분들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지나다니는 정도로 사람도 별로 없었다.

유달산 북쪽 죽교동과 목원동 (좌) / 이제는 많이 죽어버렸다는 구 시가지 (우)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까지 오니 데크로 만들어진 내리막길이 나왔다.

코로나로 상점들이 많이 닫혀 있었지만 다행히도 파스쿠치에서 음료를 팔고 있어서 목을 축이고 가기로 했다.

더위도 잠시 피하고 목도 축이며 (좌) 자리에서 목포 시경도 감상 (우)

재밌는 사실은 목포해상케이블카가 우리나라에선 가장 긴 해상케이블카(3.23km)이고 세계에서도 볼리비아 라파스에 이은 두 번째로 높은 케이블카(해발 155m)라고 한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ㅎㅎ


우리가 탑승한 곳은 전체 구간 중 중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케이블카는 고하도에서부터 영산호를 넘어 유달산을 넘어간다. 기왕 타보는 거 돈 좀 더 얹어서 바닥이 뚫린 '크리스탈' 케이블카를 타고 고하도 방향으로 왕복권을 끊었다.


저기 보이는 정자가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

다행히 우리 둘 다 고소공포증이 심하지 않아서 아주 여유 있게 유리바닥 케이블카를 평온한 마음으로 탈 수 있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바닥 유리도 아주 투명하게 잘 보인다.
우리가 탑승했던 유달산승강장

유달산 기슭에 있는 서산동 언덕마을이 보이고 옆으로는 조선내화 구목포공장이 보인다. 참고로 이름이 굉장히 옛스러워서(?) 이제는 사라진 회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1947년 창업이래 아직까지도 제철, 제강, 유리, 시멘트 등 내화물 제품 제조/판매를 하는 코스피 상장기업이었다! 나름 내실 있는 장수 기업이었다.

저 멀리 목포대교가 보인다.

유달산에서 고하도로 내려가는 구간.

출발 전에 태풍 소식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물색깔이 매우 탁했다 ㅠ

(사실 태풍이 없었다면 울릉도/독도에 도전해 보려고 했었다. 작년 8.15를 기념해 태극기 들고 독도 상륙해 보려 했었는데 그 때도 태풍 때문에 무산됐었는데 2년 연속 무산되고 말았다.ㅠㅠ)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시덥잖은 남자들의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군대 이야기(친구는 아빠가 자기 몰래 입영신청서를 내서 갑자기 입대를 하게 되었다고...ㅎㅎ), 항공대를 나온 친구는 왜 조종사가 되지 않고 개발자가 되었는지, 실제로 이제 막 조종사 된 친구들은 코로나 때문에 비행 수가 많이 줄어 진로를 변경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


참 세상일이 어떻게 변할 지 알 수 없다. 과연 세상의 그 누가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대유행할 지 알았겠는가... 살다 보니 참 별일이 다 있다.


하긴 100년 전 있었을 일제 치하의 한국이며, 세계 대전에 휘말렸을 당시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이런 불안함과 불편함도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겠다.  

구름낀 하늘에 탁한 바다... 베스트 뷰는 아녔지만 뻥뚫린 뱃길이 시원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파란 하늘에 푸른 바다였다면 얼마나 더 시원했을 지...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뷰다.

고하도에는 딱히 볼 거리가 없는 데다 그나마 있는 고하도 전망대도 코로나로 입장이 불가해서(코로나 시기의 여행이란 이런 것일까..ㅠ) 케이블카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고백...


고하도 지역은 아직 관광적으로 개발이 되지 않아 사실 내릴 이유가 크지 않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다른 목적지로의 이동'에 그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케이블카를 타고 보는 뷰에 더 큰 의의가 있어 보인다. 무릇 여행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도착지는 그저 하나의 이정표일 뿐,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고 깨닫는 것들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고하도 땅을 밟아 보지도 않은 채 다시 유달산으로 유턴을 했다.

멀리서 보니 유달산도 꽤 높아 보이긴 하네...ㅎㅎㅎ

오를 때 많이 힘들지 않았던 걸 보니 참 오르기 좋은 산임에는 틀림 없다.



지지리도 운 없었던 한국, 그래도 우리는 기적 같이 일어서고 있다!


유달산으로 가는 길에 했던 얘기들도 얼핏 기억이 난다.

일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목포의 얘기는 자연스레 일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대학시절 관심이 많았던 국제정치와 한일관계의 관점에서 나의 생각들을 얘기했다.


학창시절 당시만 해도 나는 한국이 일본을 앞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한국(당시 조선)보다 몇 십년 빠른 근대화를 시작했다. 당시는 정보가 지금처럼 빠르고 자유롭게 왕래하지 않았으니 쇄국을 고수했던 조선은 계속해서 뒤쳐졌고 산업화 역량은 벌어졌다. (반면 지금은 정보의 교류가 빨라져, 다른 곳의 앞선 기술과 문화를 금방 배우고 따라할 수가 있다. 격차를 벌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우리가 격차를 좁히려 하는동안 다른 곳은 더 빨리 도망갈 테고 말이다.)


일본은 그렇게 한국을 식민지화해서 많은 인력과 자원을 수탈하고 피폐화시켰다. 심지어 패망한 이후에도 6.25 전쟁에서 전쟁물자를 팔아 먹어서 전쟁 가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고혈을 빨아 국가경제 재건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 당시를 생각하며 왜 이리도 한국은 운이 없을까... 일본은 왜 이리도 운이 좋을까 라는 생각에 허탈해 했던 기억이 난다.


전쟁에서 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주변국 눈치 보며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고 결국 통일도 이루게 된다.

반면 한국은 어떠한가?

패전국인 일본은 분단은 커녕 미소 냉전을 위한 동아시아 군참기지로서 오히려 미국의 비호를 받고 6.25 전쟁에 군수 기지로서 재빨리 재건된다. 일왕은 그대로 자리를 보존하게 되고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는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

한국은 더 심하다. (아무런 힘 없이 광복을 맞이하긴 했지만) 승전국 편이었음에도 패전국인 일본 대신 나라가 분단된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 뿐인가. 독일은 통일됐는데 우린 아직 통일 근처에도 못 가고 제자리 걸음이다. 분단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뿐만 아니라 남남대립이라는 정치적 비용 또한 천문학적 수준이다. 반 세기 넘게 의무 복무를 해야 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수많은 시간 또한 비용임에 틀림 없으리라. 이 사람들이 군대에서 보낸 시간들을 사회에서 더 유용한 곳에 썼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이루말할 수 없었을 터...


그럴 때마다 일본이 더 괴씸하게 느껴졌고 분했지만, 그들이 가진 정치/외교/경제적 위상이 어마어마했기에 그 격차를 좁히는 게 너무 버거워보였다.


여튼 한국은 참 안타까운 근현대사를 보낸 국가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순순하게 역사의 희생양이 되지도 않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는

- 6.25 전쟁과 분단의 상황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통해 아시아 네 마리의 용 중 하나가 되었다.

- 숱한 군사 쿠테타와 독재 등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도 끈질긴 민주화 운동으로, 아시아에서 흔치 않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규모 있는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여성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본 경험, 진보/보수 정권을 몇 번이고 바꾼 경험, 촛불집회로 대통령을 탄핵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수십년 째 자민당 체제가 이어지고 있고, 중국은 공산당 체제가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면 이는 정말 대단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 한 때 삼류 취급을 받던 삼성, LG, 현대차 등의 제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기 시작할 정도로 '한국 제품'의 품격은 올라갔다

-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컨텐츠) 측면에서 불고 있는 K 열풍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히 올 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BTS는 문화 컨텐츠로서 한국이 가진 저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씨들을 계속해서 잘만 살린다면, 좌충우돌하며 투닥거리며 하루도 맘 편할 날 없이 카오스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게 바로 한국의 저력이다. 서로가 싸우면서도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정반합'의 정석. 그래서 난 한국의 민주주의가 꽤나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국회의원들이 일을 잘한다거나 하는 뜻은 아니다 ㅎㅎ)


물론 개선해야 할 부분도 엄청 많을 것이다. 디테일을 보면 솔직히 내가 경험했던 이웃나라 일본에 비해 한참 뒤쳐진 부분도 아직 존재한다. 하지만 위에 말했던 저력들에서 난 언젠가 한국이 일본을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특히 통일이 된다면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두 나라는 서로 다르고 각자의 문화적 장단을 가지겠지만 말이다.)


한국도 기본적인 역량 부분에서 있어서는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격의 '디테일'을 챙기는 것이다. 나는 이런 멋진 디테일들이 수도권 등 대도시를 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듬어져야만이 진정한 국격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케이블카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지긴 했지만 오랫동안 내가 실제 고민해 왔던 부분이기도 하다. (첨언하자면 나는 일본 제국주의/우익은 매우 싫어하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일본 사람, 문화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그들 중에는 분명 좋고 본받을 부분이 있다.)


앞으로도 남한유량기를 통해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계속해서 직접 경험해 보며 생각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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