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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May 09. 2023

나를 깨뜨리는 여행을 떠났다

중동에서 유럽, 유럽에서 남미까지 총 4개월을 떠나다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오르티세이 지역 세체다(Seceda)에서


  바쁜 2022년의 절반을 보냈다. 그동안 미뤄둔 자격증이나 학업 성적을 갈무리하며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게 쪼개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회사에 취직했거나 평생을 함께할 영혼의 단짝을 찾았고, 그도 아니라면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 정신없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저 사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해야 하니까 하고, 다들 하니까 하는 식으로 종이 인형처럼.


  그렇게 남들 사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도 꾸릴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친구의 뜬금없는 세계여행 제안을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렇게 살아가는 그림이 눈앞에 선했는데. 친구는 나더러 함께 독일로 방문학생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보통은 단호히 거절하는 편이 적은 나는 그 제안만큼은 크게 고민 않고 답했다. 독일은 크게 궁금하지도 않은 나라였고, 유럽에 대한 로망도 딱히 없던 내게 유럽 방문학생과 당장의 취업은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거절 직후 친구의 입에서 '남미'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순조롭게 흘러가던 내 지루한 일상에 금이 갔다.


  남미에 대한 내 로망은 우유니 사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거실 한편에 틀어둔 TV 영상에서 새하얀 소금 사막을 본 순간부터 시작된 우유니에 대한 열망은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남미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우유니를 제외한 볼리비아의 다른 지역은 어떤 느낌인지조 차도 잘 모르면서, 나는 남미에 가면 꿈에 그리던 그 소금 사막을 밟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자리에서 친구와 협상을 했다. 여행을 떠날 당시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던 시기라 여행 경비가 부족했다. 6개월은 힘들고, 대신 4개월로 가자. 4개월이면 여행을 갔다 돌아와서 일상에 적응할 시간도 충분할 것 같았다. 친구는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그렇게 우리의 즉흥 여행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집 근처 카페에 모여 여행 계획에 몰두했다. 이렇게 긴 여행도, 먼 곳으로 훌쩍 떠나는 것도 처음인 둘은 4개월간 여행할 나라를 고르는 것부터 삐걱댔다. 아마 처음에 고른 방문지 리스트를 그대로 고수했다면, 유럽 전역을 2개월 동안 돌고 남미 전역도 2개월 동안 도는 그런 극기훈련 같은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우리는 겨우 현실과 타협했고 결국 요르단에서 출발해 유럽에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그리고 남미로 넘어가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를 밟기로 했다.


  여행 계획을 짜지 않을 때면 아르바이트에 몰두했다. 몇 년간 알뜰살뜰 모은 돈을 전부 쏟아붓는다 해도 미친 환율과 물가 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4개월 여행비로는 턱도 없었다. 아침에는 스터디 카페에 가서 청소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 가서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알바몬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이것저것 골라 다 했으며 일일 물류 아르바이트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남미에 가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스페인어도 틈틈이 공부했다. 스페인어 인사인 '올라(Hola!)'에서부터 시작해 숫자 세기까지 열심히 외운 덕에 남미에서 기념품을 살 때 편리했다.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한 단어 조합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니 답답하지 않았다. 남미를 돌아다니다 보니 스페인어 듣기 실력도 향상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혀를 엄청난 속도로 굴려야 하는 Rr 발음은 어렵다.




  카페에 모여 계획을 짜던 어느 날, 여행은 비행기 티켓을 사야 시작이라는 대화를 나누다 요르단행 항공권을 끊었다. 여권번호와 이름이 입력된 온라인 티켓 파일을 받으니 4개월 후 한국 땅을 뜬다는 게 실감 났다. 비행기를 탈 때 한국에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소중한 가족과 우리 집 고양이, 친한 친구들, 그리고 지루하지만 익숙한 내 일상까지. 4개월 동안 이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 저 머나먼 이국 땅을 돌아다닌다는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도, 막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떠났다. 여행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와 삶이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그런 변화는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한국에서의 일상에 쫓기듯이 살아오는 동안 늘 손에 닿을락 말락 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내 삶의 한 모퉁이에 끌어들이고 싶은 가치, 다양한 곳을 누비고 다니며 지금껏 살아온 틀에 박힌 방식을 훌훌 털어낸다면 자연스레 내게로 올 여유. 나는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2022년 9월, 둘을 태운 비행기는 저 먼 요르단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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