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놈의 현실은 여행지까지 따라오네!

by RAMI

나는 지금 태국에 있다. 감정이 치고 올라오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티켓을 구매했다. 마치 내 상황을 토닥여 주듯 티켓값은 저렴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지금 나는 태국에 있다. 이런 갑작스러운 여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 생기거나 상황이 버거워질 때면, 나는 종종 미리 티켓을 끊어 두고 그 여행을 기다리며 마음을 달랜다. 여행을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나는 그동안 내게 달라붙어 있던 것들을 털어내듯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러고 나면 마치 잠시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이란 필수이다.


나는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파타야로 향했다. 원래는 후아힌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최근 숙소 가격도 많이 올랐고 바트화도 강세라 바다를 볼 수 있으면서도 조금 더 저렴한 파타야로 방향을 바꾸었다.

파타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바다가 점점 가까워질 무렵 나는 무심코 주식 창을 열어 보았다. 화면은 꽤 참담했다. 파란색 숫자들이 가득했다. 분명 내가 매수했던 종목들은 모두 수익 구간에 있었는데,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이너스로 돌아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이 화면을 봤다면 아마 꽤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차트를 계속 새로고침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초조해 있었을 것이다. 시장 뉴스도 찾아보고 경제 기사도 뒤적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타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조금 달랐다.


창 박에서는 해가 천천히 바다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휴대폰 화면 속에서는 내 주식이 계속 파란색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번갈아 보다가 대비되는 색상에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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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은 붉게 떨어지고 있는데, 내 주식은 파랗게 떨어지고 있네"


그 순간 나는 내가 조금 우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와서도 여전히 주식 창을 열어 보고 있는 모습도 그렇고, 바다를 보러 가는 길에 숫자들의 색깔을 확인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다. 결국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여행을 떠났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따라오는 모양이다. 사람이 아무리 멀리 떠나도, 자신의 삶까지 두고 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였다.


한국에서라면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일들이, 여행지에서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보였다.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 화면도 여전히 같은 숫자들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숫자들이 내 마음까지 끌고 내려가지는 못했다. 아마도 사람은 장소를 바꾸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거리를 잠시 바꿀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잇던 곳에서 멀리 떠나도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여행을 오면 모든 것이 잠시 멈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내 현실은 그대로 나를 따라오고 있다. 내가 두고 왔다고 생각했던 삶도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간다. 물리적으로는 몇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 현실을 없애 주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여행지에서는 그 현실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라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보였던 것들이, 낯선 풍경 속에서는 잠시 멀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거리를 잠시 바꾸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거리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눈앞에 있는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고, 지금의 문제들이 삶 전체를 덮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그 일들은 생각보다 작은 크기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지금 버스 안에서 휴대폰 화면과 창밖의 바다를 번갈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현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나는 그 현실을 조금 다른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비극이 내게는 희극처럼 다가온다. 그거면 된다. 어쩌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거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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