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겨울 날씨는 유난히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따듯한 밀크티 한 모금의 온기가 부드럽게 온몸으로 퍼져나가 추위를 밀어내듯 것처럼, 옛 사진의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스며든다. 오늘은 문득,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보고 싶어졌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들 중 가장 처음으로 찍힌 사진부터 천천히 훑어 내려갔면서 사진을 눈에 담았다. 십 년이 훌쩍 넘은 기록들 속에는 어제 일처럼 또렷한 장면도 있었고, 물에 풀어놓은 물감처럼 흐릿해져 버린 기억들도 있었다. 분명 내가 기록한 순간들인데, 어떤 장면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진 속의 나는 대부분 어딘가에 있었다.
공항, 기차역, 낯선 골목과 해변, 이름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공원들과 작은 도시들. 내 사진의 대부분은 여행이었다. 그렇다. 나는 여행을 참 좋아했다. 여행을 좋아해서 떠났다. 아니, 어쩌면 좋아했다기보다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 그러하듯이.
여행을 하고 있는 내 오래된 사진들을 보면 장소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날의 분위기와 공기이다. 조금은 긴장된 얼굴, 낯선 언어에 귀를 기울이던 순간,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골목길의 풍경들. 사진에는 담기지 않은 소리와 냄새, 그리고 그때의 마음이 뒤늦게 따라온다.
혼자 떠난 첫 여행지였던 인도에서 호된 신고식을 당했던 때가 기억난다. 영어도 제대로 못했던 내가 인도 특유의 영어 발음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스친다. 델리 기차역에서 사기당해서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던 첫날, 델리가 너무 싫어서 바라나시로 도망치듯 떠났고, 거기서 장염에 걸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 못했던 때가 있었다. 마치 여행의 신이 내려준 시험처럼 인도에서의 하루가 충격과 좌절이었다. 그리고 장염이 거짓말처럼 끝나던 날, 나는 인도에서의 여행이 즐거워졌다. 여행의 신이 내려준 퀘스트를 극복하고 난 후 30일 가까이 더 인도를 여행했다. 얼마나 힘든 2주였던지 그 이후로 모든 여행지가 편했고, 쉬웠다.
여행할 때는 늘 긴장 상태이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버스나 기차를 탈 때면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혹여,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그냥 지나칠까 두려워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 방송만을 기다린다. 안내 방송에서 쏟아져 나오는 알 수 없는 문장 중에 내가 내려야 하는 도시의 이름을 듣기 위해서 어색한 현지 도시나 정류장 이름을 머리에 계속 되뇐다.
한 번은 북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오흐리드에 도착했다. 그곳 사람들은 비 오는 겨울날 크리스마스 마켓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라고 했는데, 비만 일주일 동안 주야장천 내렸다. 비구름에 가려진 호수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배낭여행 중이었기에 무거운 우산보다는 가벼운 우의를 선택했는데 겨울비에 우비는 몸을 더 차갑게 했다. 호수를 보겠다는 일념을 포기하고 이틀 후에 떠나는 버스티켓을 예약하고 온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해가 떴다. 수묵화의 하늘은 수채화의 빛이 번졌다. 사람이 없던 거리에는 젊은 남녀들이 넘쳐났고, 내 우의와 젖은 옷들도 포근포근해졌다.
어떤 여행은 분명 즐거웠고, 어떤 여행은 사무치게 외로웠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던 순간도 있었고, 아무 기대 없이 떠났다가 오래 기억에 남은 시간도 있었다. 사진 속에 나는 늘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 다시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불안했고, 동시에 많이 용감했다.
사진을 넘기다 보니 여행의 목적이 늘 분명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가고 싶어서 떠난 여행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행이 어딘가를 벗어나고 싶어서 떠난 여행들이었다.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나로부터 잠시 떨어지고 싶었던 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행은 늘 나에게 그런 방식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여행은 장소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사진 속 풍경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곳에 서 있던 나의 마음이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 여행들은 나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겨 놓고 있었다. 밀크티가 포근하게 느껴지는 춥고, 흐린 겨울날. 현재가 조금 희미해질 무렵, 비로소 과거가 말을 걸오 오는 날. 그리고 그 기억들 덕분에, 지금 내가 어디에서 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