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 바쁘던 오전,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한동안 연락을 못했던 아는 동생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떠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보내온 메시지를 바로 확인했다.
"잘 지내십니까? 그냥 생각나서 한번 연락해 봤어"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문자 한 통 주고받지 못한 지 벌서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안부 문자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반갑고 기쁜데,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해졌다.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가 오갔고, 내 한 마디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서로 안 지도 벌써 10년이다."
나는 이 친구를 10년 전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만났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불가리아를 여행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인도와 두바이를 여행하고, 잠깐 터키를 들렀다가 불가리아로 넘어온 상황이었다. 두 달이 넘는 여행 기간 동안 한국 사람을 거의 만나지를 못했다. 이스탄불에서 잠깐 한국인을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였다. 마음껏 한국말로 대화하지 못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혼잣말이 늘어가던 시기였다.
어느 이른 아침, 호스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며 잠깐 기다려 달리라는 호스텔 직원의 말에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두 여성 분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고, 부끄러움도 없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 인이세요?"
당연히 그 두 여성분은 많이 당황했다. 나중에 이야기로는, 내가 여행 고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의 나는 어깨까지 오는 장발에 인도에서 산 알라딘 바지를 입고, 경량 패딩 위에 인도에서 구매한 감차(Gamcha)를 두르고 있었다. 한국인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한국인이세요?"
바로 이 친구이다. 호스텔 직원은 우리 모두 같은 호실이라면서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한국인 팀이 결성되었다. 첫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딱 그 정도의 거리만 유지한 채 각자의 여행을 즐겼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게 차를 랜트해서 주변 명소를 여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차를 빌려서 불가리아의 시골길을 달렸다.
"형이랑 렌트해서 동굴 갔던 거 기억나 밤에?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용기였는지, 거기 빛 하나 안 드는 외진 곳이었는데."
"그때라서 가능했었던 것 같아. 그 밤에 우리 공터 주차장에서 차 한 대 보고 도망치듯이 나왔던 거 기억나?"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이 친구와 함께 야간 촬영을 위해 프로호드나 동굴을 간 적이 있다. 빛하나 들지 않는 산 길을 손전등 빛에 의존해서 비틀대며 걸었었다. 불가리아의 겨울은 달 빛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만이 가득했다. 오로지 바람에 실려오는 소리들과 겨울 향기를 맡으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의 눈을 연상시키는 두 구멍이 천장에 뚫려 있었다.
동굴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두 개의 구멍을 통해 보이던 흐린 겨울 하늘은 바깥에서 보단 것보다 훨씬 따뜻해 보였다. 이 친구는 삼각대를 펼치고, 동굴 천장의 구멍을 향해 초점을 잡았다.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별말 없이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무섭다는 말도, 돌아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이 괜히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예감만이, 지금 이 시간이 잘 나온 사진처럼 오래 간직되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의 동행은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뿐이었다. 물론 같은 호수를 쓰던 두 여성분과도 친해져서 지금까지 가끔 모임을 하기도 한다. 사진이 찍히던 그 순간으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았고, 자주 연락하지도 못했다. 그날의 동굴처럼 어두운 시간들도 각자 혼자 건너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그냥 생각나서..."
어쩌면 그날 불가리아의 시골길을 함께 달렸던 기억은, 여행의 추억이 아니라 관계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연락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 시간이 흘러도 이름 하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거리감. 2월의 겨울의 어느 오전, 나는 다시 그 밤을 떠올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밤을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꼭 아쉬움으로만 남지는 않는다. 모든 시간이 반복될 필요는 없고, 모든 밤이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
그날 동굴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처럼, 빛은 부족했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던 기억을 품은 채 우리는 앞으로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서로를 떠올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