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체로 "행복해지기 위하여 산다."라고 말한다. 지금이 고단해도 언젠가 더 나은 상태, 더 편안한 미래, 더 밝은 감정을 얻기 위해 오늘을 견디고 산다. 이 문장에 많이들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불안하다. 너무 쉽게 동의되는 문장은 종종,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불교는 삶을 고통으로부터 출발시킨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같은 삶의 조건들이 고통의 형태로 드러나며, 그 고통의 원인과 그로부터의 벗어남을 설명한다. 불교가 말하는 목표는 단순한 행복의 증가라기보다, 고통을 발행시키는 조건 자체가 약해지고 사라지는 방향을 향한다. 즉,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에 가깝다.
기독교 역시 궁극적 목적을 설명할 때 천국을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로 쉽게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 핵심은 심리적 쾌락이 아니라 구원과 신과의 관계의 회복에 더 가깝다. 천국은 단지 좋은 감정의 지속이 아니라, 존재가 근원적으로 안착하는 장소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많이들 인생의 목표로 삼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단지 기분 좋은 상태의 총합인가. 고통이 제거된 상태인가. 아니면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어떤 안정감인가... 여기에서 나는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행복을 위해 안락사나 자살을 선택하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인간의 존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단번에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나 행복의 총량은 측정할 수 없고, 불행의 깊이 또한 객관적으로 재단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고통은 타인의 판단으로 간단히 환산되지 않는다.
나는 안락사에 대해 비교적 허용적인 입장에 가깝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린다. 삶의 가치를 행복의 총량과 고통의 최소화로만 계산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의 삶은 어느새 비용-편익 분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우리는 위험한 문턱 위에 서게 된다. 노인, 아이, 장애인, 만성 질환자, 우울증 환자처럼 행복을 생산하기 어렵다고 간주되는 존재들의 삶은 더 쉽게 낮은 가치로 분류될 수 있다. 행복의 기준이 정교해질수록, 기준 밖의 삶은 더 잔인하게 배제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의심해 본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일 수 있을까. 행복은 분명 중요하지만, 삶 전체를 대표하는 목적어가 되기에는 너무나 얇다. 행복만을 목표로 삼는 순간, 고통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되고, 의미는 기분 좋은 상태로 환원되며, 존재는 효율적으로 관리되는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고통과 의미 사이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상태가 삶의 핵심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삶이란 부조리하다. 부조리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견뎌야 하는 구조에 가깝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리고, 납득되지 않는 손실을 경험하고,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시간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 부조리 앞에서 무너지는 것만이 인간의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부조리함에 도전하고, 반항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행복을 만들기 위해 고통을 단순히 제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좌절과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며 결론을 미루고 질문을 유지하는 것... 그 과정이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고민의 결론의 끝에서 허무를 본다. 지속적인 의미 부여는 결국 최종 의미를 유예하는 것이고, 완성된 결론을 뒤로 미루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착지는 있는가? 도착지가 없다면 이 사유의 끝에는 벽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지 않은가.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언젠가 내 삶의 끝에서 마주할 허무를 내가 어떤 얼굴로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허무를 없애기 위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게 될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다시 질문한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삶의 한 결과이거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삶은 행복으로만 평가되기에는 너무 깊고, 너무 복잡하다. 그리고 나는 그 복잡함을 성급한 결론으로 단순화하고 싶지 않다.
2019년작 드라마 [의사 요한]을 보며 생각해 본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