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을 나는 잘 견디지 못한다.

by RAMI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게임이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다룰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튜토리얼이다. 인터페이스를 알려주고, 버튼의 역할을 설명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차분히 가르쳐준다.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이다. 사실 가장 중요하지만, 다른 비슷한 류의 게임을 해본 경우 이 과정을 쉽게 지나치거나, 빨리 넘기고 싶어 한다.


감각과 요령으로만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 있다. 튜토리얼을 대충 넘기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듯, 배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본기를 깊이 다지지 않아도 중급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주변에서 잘한다고 말해준다. 무언가를 만들고, 결과가 나오고, 칭찬도 따라온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문제는 늘 그다음이었다.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처음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이 막힌다. 더 나아가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문제가 생겼을 때 고칠 수 없고, 다시 돌아갈 지점도 없다. 대체적으로 경험에 의한 노하우에 의존할 뿐, 근본적인 원인 해결을 위한 접근은 아니다. 그제야 튜토리얼과 같은 기본기가 떠오른다. 처음에 지루해서 대충 넘겨버렸던 그 단계가 말이다.


많은 이들이 흔히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기본기는 성취감을 거의 주지 않는다. 반복적이고, 느리고, 지루하다. 잘하고 있다는 증거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늘 기본기 훈련을 할 때면 조급해진다. 어느 정도 모양이 나오기 시작하면, 나는 곧바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거나, 적용을 하려 한다. 내가 해왔던 디자인도 그랬고, 지금 하고 있는 3D 모델링 업무도 그렇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를 만들고,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성장 자체보다 가능성의 확인을 더 원했던 것 같다. 기본기를 쌓는 시간은 내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고, 반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순간에는 즉각적인 보상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와 사람들의 반응이 그것이다. 나는 아마도 느린 성장을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니라, 조용한 시간을 견디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는 중급까지는 빠르게 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요구되는 것이 달라진다. 감각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해지고, 요령이 아니라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왜 이렇게 되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문제를 분해하고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기본기는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가 된다.


나는 늘 중급에 멈춰있다. 내가 배워온 모든 것들이 말이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성장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미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걸까.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길로 이어진다. 성장은 느리고, 반복적이며, 지루하다. 반면 잘 보이는 것은 빠르고, 창의적이며, 즉각적인 보상을 준다. 그래서 나는 늘 후자를 선택했다.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배우거나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올 수 있는 좌표를 만들기 위해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 나는 이미 중급까지 갈 수 있는 체력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멈춰 서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견디는 마음이다.

기본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뒤로 가는 일이 아니라 깊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 시작해야 하는 모든 것들은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걸음을 이어간다. 조급해하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단계에서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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