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여기 오지 말아요. 우리랑 안 어울려요.

by RAMI
다신 여기 오지 말아요. 우리랑 안 어울려요.


2003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남긴 대사다. 긴 명절 연휴, 특별히 할 일 없이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이 옛날 영화 한 편을 발견했다. 분명 개봉 당시에 보았던 작품이었는데,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의 나는 이 영화를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거나, 혹은 공감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소외감과 상실감을 안고 있는 한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이 호텔 라운지 바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를 공감하듯 빠르게 친해진다. 한국 제목과 달리, 영화의 원어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으로 사랑보다는 어긋남과 누락, 이해되지 않음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로맨스라기보다, 낯선 세계 속에서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두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다룬다.


두 남녀가 낯선 도시에서 일탈하듯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호텔 방 창가에서 도쿄의 중심가를 함께 내려다본다. 그때 건네는 말이 바로 이 대사다. "다신 여기 오지 말아요. 우리랑 안 어울려요." 원문은 "Let's never come here again, 'cause it would never be as much fun"으로 의미만 놓고 보면 꽤 다른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한국어 번역이, 설령 오역일지라도 영화의 정서에는 더 가까이 닿아 있다고 느꼈다. 이 문장은 즐거움에 대한 말이 아니라, 어울리지 않음에 대한 자각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도쿄는 화려하다. 네온사인의 불 빛과 군중과 차량의 클락션이 만들어 낸 소리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주인공들은 끝내 섞이지 못한다. 마치 언어는 통역이 되지만, 맥락은 번역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그 어긋남은 단순한 문화 차이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의 형태와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이 대사가 "지금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선언으로 들리기보다는,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조용한 고백처럼 와닿았다.


나는 해외에서 살고 싶어 한다. 한국이 싫어서 해외의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와 어울리는 곳이 어디일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 어울림은 화려함이나 시스템의 완성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편의와 효율만 놓고 본다면, 나는 한국만큼 조건을 갖춘 나라는 없다고 본다. 언어는 물론 행정이 빠르고, 사회 규칙도 안전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온전히 내 자리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이 말은 불만이나 비판이라기보다,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설명이 어렵고 말하려고 하면 늘 조금씩 어긋난다. 마치 잘 맞는 옷을 입고 있지만, 어깨 어딘가가 계속 걸리는 느낌처럼... 불편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편안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다. 나는 계속 그런 감각 속에 있다.


그래서 나는 해외를 생각한다. 아직 어느 나라로 가고 싶은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더 나은 나라를 찾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와 어울리는 삶의 리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 어울림은 화려한 풍경이나 제도의 완성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자리, 그런 종류의 안정에 가깝다.


내 주변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미국의 비율이 유독 높다. 최근에도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나 역시 한때 미국을 꿈에 그리던 나라로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출장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미국을 오가며, 내 꿈은 점점 구체적인 판단으로 바뀌었다. 최근까지도 주재원으로 나가보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분명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국은 내게 살아보고 싶은 나라라기보다는, 머물 수는 있지만 정착하고 싶지 않은 공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곳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장점이 분명한 나라다. 다만,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각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분명했다. 나와 리듬이 맞지 않고, 정서적으로 다른 노선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계속 따라다녔다. 마치 항상 통역을 거쳐야만 전달되는 언어처럼, 나는 그곳에서 온전히 완성도 있는 문장이 되지 못했다.


그때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더 나은 나라'가 아니라, 덜 번역해도 되는 삶이 아닐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자리. 나를 낯설게 만들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낯섦을 감당해도 괜찮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다신 여기 오지 말아요. 우리랑 안 어울려요."

이 말은 내게 정직한 인식으로 들린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말, 그 사실을 인정해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종종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도 잘 적응해 보이기 위해 애쓴다. 버텨내고, 맞추고, 익숙해진다. 그러나 익숙함이 곧 어울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여행을 꿈꾼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나와 조용히 어울리는 장소를 만나기 위해서. 그곳이 어느 나라든, 어느 도시든, 혹은 아직 이름조차 없는 곳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내가 더 이상 통역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말이 설명보다 먼저 도착하고, 존재가 역할보다 앞서는 상태. 나는 그런 삶의 좌표를 아직 포기하지 않고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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