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없었던 환경에 놓여본 적이 있다.
나는 여행 중이었다. 한국인이 잘 찾지 않는 그런 국가들로만 이동하며 여행을 다녔다. 당시 나는 주로 호스텔에 머물렀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인 여행자들은 대개 한인 게스트 하우스나 홈스테이를 이용하던 시기였다. 한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길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다지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곳의 여행자들은 모두 외국인이었고, 그들 모두 나처럼 어색하기는 매한가지라 낯섦을 공평하게 나눠갖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어로든, 손짓으로든 어떻게든 의사는 전달되었고, 여행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상한 감각이 따라붙었다. 말이 막혀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방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느낌. 설명은 할 수 있지만, 농담은 사라졌고, 감정은 축약되었으며, 미묘한 뉘앙스는 늘 중간에서 끊겼다.
한국어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편해지자, 다른 방식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스스로에게도 낯선 행동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증상이 모국어로 하는 혼잣말이었다. 중얼거리는 것을 넘어서 혼잣 말로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순간 내가 한국어를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는 지금의 결핍이, 어떻게든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다는 집착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미국 뉴멕시코로 출장을 거의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다녀온 적이 있다. 거리에서 아시아인을 만나기 힘들 정도의 도시였다. 출장 업무도 현지 로컬들과 해야 했다. 한국인 통역분이 계셨지만, 자기 할 일이 있다며 통역 업무보다는 다른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쓰셨다. 결국 그 분과 틀어져서 일반적인 대화조차 나눌 시간도 마음도 없어졌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영어로 출장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한국어뿐 아니라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해지자, 나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더 또렷하게 말하려 했고, 더 정중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려 했으며, 이해받지 못할까 봐 문장을 여러 번 고쳐 말했다. 그때의 나는 단순히 언어를 잃은 상태가 아니라 이해받고 싶다는 감각을 집착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어를 쓰지 못했던 그 시간 자체가 나를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설명은 가능했고, 필요한 말은 어떻게든 전달되었다. 결핍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정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불편함이 누적되자, 나는 그 결핍을 그대로 두지 못했다. 무언가를 회복하고 싶었고, 최소한 이 상황을 내가 다루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다.
언어는 내 의지로 단숨에 성장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나는 대신 통제 가능한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혼잣말을 하거나, 레이더처럼 귀를 쫑긋 열고 한국어가 들리기를 기다리거나,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애를 쓰며 스스로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소통을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내가 아직 무력하지 않다는 자기 확신과 해소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후 뉴멕시코에서 내게 발생한 결핍과 집착은 불안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뉴멕시코에서의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그래서 문장을 반복했고 심지어 통째로 외우기도 했으며, 설명을 고쳤고, 표정을 관리했다. 집착은 늘 이렇게 등장한다.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핍 앞에서 무너질 것 같은 나를 붙잡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결핍이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은, 무언가가 없을 때가 아니라 그 없음이 나를 규정할까 두려워질 때라는 것을 느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할 때, 인간은 통제 가능한 행동을 만들어낸다. 집착은 선택이 아니라 반사작용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결핍이 이렇게 스스로를 지탱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결핍은 집착이 되었을 때, 오히려 삶의 시선을 더 좁히기도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뒤처지지 않고 싶다는 불안,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초조함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함이나 책임감, 혹은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지만, 실은 결핍을 느끼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행동에 가깝다.
예를 들어, 인정에 대한 결핍은 나에게서 과도한 설명과 증명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미 충분히 해낸 일 앞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확인받으려한다. 안정에 대한 결핍은 지나친 계획과 통제로 변한다. 작은 변수에도 불안해지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초조함에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집착은 나를 보호하기보다, 나를 더 나아갈 수 없게 하고, 점점 더 소진시킨다.
집착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그것이 결핍을 채우지 못할 때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두지 못할 때라는 것을 느낀다. 결핍을 느끼지 않기 위해 선택한 행동이, 결국 나를 더 작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적응이 아니라 왜곡에 가깝다.
결핍을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없음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로도 충분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핍을 채우려 하기보다, 결핍을 느끼지 않으려 애쓴다. 집착은 그 회피의 가장 정교한 형태다. 그래서 문제는 결핍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핍을 대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