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노 Feb 14. 2017

내 딸에게 읽어주는 첫 번째 공주 이야기

「종이봉지공주」-로버트문치 글, 마이클마첸코 그림

  첫 임신, 그리고 그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안겨준 내 아이가 여자라는 그 생물학적이고 단순한 사실. 그 사실은 알 수 없는 애틋함, 안쓰러움, 그리고 부담감과 책임감을 함께 가져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사회에서 내가 여자로 살아가고 있단걸 자각했다. 그리고 결혼, 출산과 양육을 거치면서 비로소 나는 일상 곳곳에서 그러한 사실과 마주쳐야했다. 분명 딸이라고 덜 귀하게 자라지 않았고, 학창시절 내내 똑같이 노력하고 경쟁해서 성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불일치와 괴리가 억울했다. 때로는 내가 예민한 것인가 헷갈리기도 했고,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고 체념하는 부분도 생겼다. 그 때서야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잠재적으로 주입되어온 '순종적 여성'이나 '희생적 성' 등에 대한 역할 강압이 오랜 시간 내재되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느꼈던 묘한 안쓰러움은 설령 내 울타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 키워내더라도, 아니 어쩌면 최선을 다할수록 내 딸이 더 날카롭고 예민하게 마주하게 될  혼란과 고달픔에  대한 동료애 같은 것이었다.


공주의 선택권은 없는, 사실은 왕자가 주인공인 공주 이야기


  어릴 적 읽었던 수많은 공주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공주가 아니었다. 공주가 어려움과 역경을 지나는 기나긴 이야기 속에서 그저 마지막에 잠깐 등장하는 주제에 상황을 반전시키는 키를 쥐는 것은 왕자였다. 멋진 왕자가 나타나야지만 문제가 해결되고, 마지막에 공주는 그런 왕자와 결혼해야 행복하게 끝이 난다. 그러나 「종이봉지공주」는 위험에서 구해줄 왕자를 기다리는 여느 공주의 이야기와 다르다.

  앨리자베스는 아름다운 공주다. 그리고 곧 도날드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예정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무서운 용이 나타나 앨리자베스의 성을 부수고 뜨거운 불로 그녀의 옷을 홀랑 불태운 후, 도날드 왕자를 잡아가버린다.
   앨리자베스는 폐허가 된 길 위에서 종이봉지 한 장을 주워 입고 도날드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무서운 용을 찾아간 공주는 용을 살살 꼬드겨 추켜세우며 불길을 모두 내뿜고 세상을 몇 바퀴나 돌고 오게 만든다. 그리고 용이 지쳐 쓰러진 틈을 타 무사히 도날드 왕자를 구해낸다.
  그런데 도날드 왕자는 되려 앨리자베스의 지저분한 차림새를  타박하며 당장 '공주처럼' 챙겨입고 다시 오라고 말한다. 앨리자베스는 그런 도날드에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라고 말하고 '결국 두 사람은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로 이야기는 끝난다.


  어쩌면 이조차도 식상한 이야기라고 할지 모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시대는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늘도 여전히 아이는 남성으로 상징되는 캐릭터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여성으로 상징되는 캐릭터는 그 옆에서 상냥하고 조신한 조연으로 일을 돕는 유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다. (아이가 열광하던 뽀로로도, 요새 열광하는 폴리도 그렇다) 그리고 아마도 그 구조는 아이가 자라서도 또 다른 형태로 계속 반복 주입되는 코르셋이 될 것이다.


내가 진짜 주인공이 되는 공주 이야기

  마지막 장면에서 떠오르는 태양 속으로 뛰어드는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은  자유롭다 못해 통쾌하다.
아마도 앨리자베쓰는 앞으로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테고, 또다른 왕자를 찾아 결혼을 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앨리자베쓰는 자신에게 기대되는 '공주로서의 껍질'에 스스로 코르셋을 조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단단한 자아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공주보다도 행복해보인다.   


  공주가 뭐야? 왕자가 뭐야? 라고 묻는 다섯 살. 아이는 아직까지 공주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나 책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저 용이라는 괴물이 나타난 것이 무섭고, 그런 용을 물리치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는 딸에게 처음 만나는 공주 이야기가 적어도 예쁘게 차려입고 왕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라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책 수업] 평화 : 세상에 행복한 전쟁이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