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사투리로 들려주는 할아버지 옛이야기 2
훤한 대낮에 도깨비를 만난다는 기 말이나 되는 소리가 어데. 느거들 같으모 어떻겠노? 기절 안 했겄나. 그런데 이 신윤이는 담도 컸는 기라. 마 쪼깨 쫄았긴 했지만서도 도깨비한테 기싸움에서 밀리모 낭패를 본다 생각해가 일부러 태연한 척 했는기라.
“깜짝 놀랬다 아이가! 그란데 무슨 도깨비가 대낮부터 사람을 놀래키고 그라노?”
“진짜 놀랬나? 아인 거 같은데. 진짜 놀랬으모 발라당 뒤로 나자빠지야 되는 거 아이가?”
그러고 보이 도깨비 말이 맞는 거라. 진짜 놀랬으모 화들짝 놀라가 엉덩방아라도 찍어야 되는 긴데, 신윤이 그거까진 연기할 생각을 못했는 기라. 머 어짜겄노. 솔직하게 대응하는 게 상수다 싶어,
“산에 오를 때 초입에서부터 니를 알아챘다. 딱 보이 나쁜 짓하는 도깨비는 아인 거 같고 그래가 그냥 모른 체했던 기다.”
“와, 김서방 니는 참 대단하다. 다른 사람들 같으모 벌써 기절하고 난리 났을 낀데.”
“봐라, 도깨비야. 나는 김서방이 아이고 박신윤이다. 아직 어리니까 서방은 안 어울리는 말이고 그냥 박도령이라 캐라.”
“무슨 소리 하노? 도깨비 한테는 모든 남자가 다 김서방이다.”
“그거는 도깨비가 사람 성을 모를 때 하는 소리고. 내가 박씨라는 걸 인자 알았으니까 내 말대로 박도령이라고 불러라.”
야들아, 생각해봐라. 너희들 맨키로 어린 친구가 산속에서 도깨비를 마주쳤는데, 별로 쫄지도 않고 오히려 지를 박도령이라 불러라꼬 도깨비한테 요구한다는 기 참말로 대단하다 아이가.
도깨비도 꼬마가 참 맹랑하다 싶었던지,
“알겠고. 야, 박 도령아. 니 내하고 씨름 한판 안 할래? 내를 이기모 오늘 니 소원 다 들어주께.”
하고 말을 돌리는 거야.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말이 솔깃해지긴 했는데, 솔직히 도깨비랑 씨름해서 이겼다는 사람 없다는 거 어린 신윤이지만 다 알고 있거든. 그래서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아이가.
“됐고. 나 바쁘거든.”
‘허허, 이 녀석 배짱 좀 보소.’ 도깨비도 무슨 이런 녀석이 다 있노 싶어. 무시무시한 도깨비를 만났는데 놀라지도 않아, 그리고 씨름 한판 하자는데 바쁘다며 튕겨. 도깨비로 봐서는 이건 치욕적인 대접인 거야. 슬슬 오기가 발동하는 거지. 심술도 점점 부풀어 오르고.
“박도령아, 그라모 니 노래는 부를 줄 아나? 걸어가면서 부르모 되니까 그거는 바쁜 거하고는 상관 없제?”
자꾸 졸졸 따라다니면서 치근덕대는 도깨비의 모습을 보니까, 어지간히 애가 타는 모양이야. 신윤이는 속으로 도깨비를 빨리 떼어내야겠다 싶어 한가지 꾀를 냈어.
“좋아. 대신 도롱이 도깨비 니가 먼저 노래하면 나도 노래 한 곡조 뽑지.”
도깨비는 신이 났어. 이제야 박도령이 자기한테 홀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거지.
“뭐, 좋아하는 노래 있어? 신청곡을 받지. 뭐든 시켜.”
“버들은.”
“뭐라구? 버들? 그게 무슨 노래야, 처음 듣는 제목인데?”
“우조 이삭대엽.”
“우조 이삭대엽은 또 뭐야?”
“이렇게 무식하고서야.”
“무, 무식?”
“우리 가곡 몰라?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 삼촌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던고”
도깨비가 박도령의 말을 듣고는 기가 꽉 막히는 거라. 자기더러 무식하다면서 시조를 한편 쫙 읊어내는데 뭐라고 반박할 말이 있어야지.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신청해! 민요도 좋아.”
“뭐든 시키라며. 도깨비가 자기 말에 책임을 안 지는 건 아니겠지? 가곡 버들은 부르지 않을 거면 꺼지시든가.”
이쯤이면 도깨비도 화가 날대로 났겠지.
“뭐라구! 한낱 사람인 주제에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너! 왜 이리 겁이 없냐? 이 도깨비방방이로 한 대 맞아 볼래? 그냥, 아프고 말 것 같제? 평생 고통스러워하다가 죽는다꼬. 오데서 까불어!”
그러면서 도롱이 도깨비는 방망이를 한손으로 치켜들고 신윤이를 내리치려는 거야. 이 순간 도깨비가 기대했던 장면이 있어. 뭘까?
아이고, 도깨비님. 잘못했어요. 박도령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제가 도깨비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그만 철없이 까불었습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시면 평생 도깨비님을 모시고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장면이야. 신윤이는 어찌했을까.
그냥 몸을 홱 돌리고는 도깨비한테 아무 대꾸나 대응도 않고 가던 길로 걸어가는 거야. 도깨비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일인 거야. 수백년 동안 이 산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난을 쳐왔는데, 이런 김서방은 처음이거든.
자기를 쳐다 봐야 방망이를 내리치는 흉내라도 낼 텐데, 몸을 돌려 등지고 걸어가는데 위협을 가할 수도 없단 말이지. 그렇다고 도깨비 체면에 뒤에서 때릴 수도 없고. 신윤이의 임기응변으로 상황이 역전된 거 느거들도 느끼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어가는 박도령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하던 도깨비가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을 접고 한 번 더 박도령을 꼬셔보려고 했지.
등명산 능선 고개 쯤 다다랐을 때 도깨비가 신윤이 앞에 다시 뿅하고 모습을 드러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