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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플로 Feb 23. 2021

섀클턴의 석회암

고생물 TMI

2021.02.15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위대한 실패"로 불리곤 하는, 인듀어런스 탐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14년에서 1916년까지, 거의 만 2년에 걸친 탐험을 통해 최초의 남극대륙 횡단을 시도했으나 실제로 남극대륙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배는 얼음 속에 갇혔다가 침몰하고 얼음 위에서 표류하다가 섬에 상륙하여 보트로 긴 항해를 하는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대원 전원이 살아서 귀환했던 파란만장한 탐험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어니스트 섀클턴 (위키피디아)
인듀어런스 탐험 경로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nchangtong&logNo=220860133029)

섀클턴은 인듀어런스 탐험 이전에도 두 차례 남극을 탐험한 적이 있다. 첫번째는 로버트 스콧의 지휘 아래 1901년에서 1903년까지 진행되었던 디스커버리호 탐험 때이다. 이때는 남위 81도 지점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되돌아서야만 했다. 두번째 탐험에서는 섀클턴이 탐험대장을 맡아 1907년에서 1909년까지 님로드 호를 타고 남극 탐험에 나섰다. 남극점에 도달하려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탐험대는 아쉽게도 남위 88도 23분 지점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까지는 남극점에 가장 근접했던 탐험대가 된 것인데, 1911년 아문센의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달하면서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 했던 섀클턴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최초의 남극대륙 횡단을 시도했던 것이 1914년의 인듀어런스 탐험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그 시도도 실패로 끝난다.


두번째 탐험, 즉 님로드 호 항해 때 섀클턴의 탐험대가 남극에서 가지고 돌아온 암석 표본 중에 고배류(archaeocyatha)의 화석이 있었다. 고배류는 하부 고생대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으로, 해면동물의 일종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형태가 컵처럼 생겼기 때문에 "오래된 컵" 이라는 의미로 고배(古杯)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생명의 역사에서 최초로 바다 밑바닥의 초(reef)를 만들었던 생물들 중 하나다. 지금의 산호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고배류의 모습 (위키피디아)

남극은 두꺼운 얼음층 밑에 대륙이 위치하고 있고, 그 중 일부분에서 얼음층을 뚫고 산 및 산맥들이 솟아 있는데, 남극을 가로지르는 중앙남극종단산맥(Central Trans-Antarctic Mountains)이 대표적이다. 그 산맥 중간, 님로드 빙하와 버드 빙하 사이에 위치한 곳에서 발견된 이 고배류 화석 덕분에 해당 지역에 분포하는 지층의 시대가 캄브리아기 초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1960년대 이후의 연구를 통해 고배류 외에도 여러 종류의 삼엽충과 완족동물, 연체동물로 생각되는 것들, 그 외에 분류가 확실하지 않은 작은 화석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화석들도 모두 캄브리아기 초기의 화석들이다. 이 지층은 고배류 화석을 발견한 탐험대의 대장, 섀클턴의 이름을 따서 섀클턴 석회암층(Shackleton Limestone) 이라고 명명된다. 

남극에서 발견된 고배류 사진 (Debrenne and Kruse 1989)

남극과 화석이라고 하면 아마 공룡을 좋아하는 사람은 크리올로포사우루스를 떠올릴텐데, (공룡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을 두신 부모님들 집에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ㅎㅎ) 크리올로포사우루스는 쥐라기 초기, 남극대륙이 지금보다는 따뜻한 곳에 위치했을 때 그곳에 살았었다. 생물이 초(reef)를 만들고 석회암이 형성되는 것은 보통 열대에서 아열대의 얕은 바다 환경이므로 고배류가 발견된 섀클턴 석회암층이 쌓이던 캄브리아기 초기의 남극은 크리올로포사우루스가 살던 쥐라기 초기의 남극보다 더 따뜻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크리올로포사우루스 (위키피디아)

섀클턴은 님로드 탐험 이후 유명인이 되어 작위도 받고 강연을 많이 다녔으나 손을 댔던 사업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인듀어런스 탐험 이후 영국에 돌아와 강연 등을 하며 생활하다가 탐험가 기질을 잠재울 수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남극탐험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남극탐험의 전초기지 정도 되는 장소인 사우스조지아섬에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유해는 아내인 에밀리 섀클턴의 뜻에 따라 사우스조지아섬에 묻히게 된다. 남극 가까이에 묻히는 것이 남편인 어니스트 섀클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잠들어있는 사우스조지아섬에서 웨델 해와 남극대륙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로스 해 근처까지 가면 자신의 이름을 딴 지층이 있다는 것을 섀클턴은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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