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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플로 Feb 21. 2021

보빗 사건과 왕털갯지렁이

고생물 TMI

2021-01-31

1993년 6월, 미국 버지니아 주에 살던 로레나 보빗은 잠든 남편 존 보빗의 성기를 잘라서 밖으로 나가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 던져버린다. 로레나는 곧 911에 전화를 걸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경찰에 체포된다. 가정폭력과 학대를 일삼던 남편이 전날 밤 자신을 강간하여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고 범행 동기를 밝힌 로레나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로레나 보빗. 일요신문

성적, 정신적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절단하는 사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종 일어나지만 이 보빗 사건은 당시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을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보빗이라는 이름이 예상치 못한 곳에 길이 남게 되는데...


환형동물은 크게 빈모류 (대충 지렁이류) 와 다모류 (대충 갯지렁이류) 의 두 종류가 있다. 이 중 다모류에는 지난번에 언급한 바다쥐를 비롯해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소에 접하기 쉽지 않은,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이 포함된다. 그 중 우리나라에서 '왕털갯지렁이' 라고 불리는 갯지렁이는 몸길이가 최대 3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게 자라는 종류인데, 이 왕털갯지렁이의 영어 이름이 보빗 벌레(Bobbit worm)다. 그렇다, 앞에서 설명한 보빗 사건의 그 보빗이 맞다.

왕털갯지렁이

왕털갯지렁이는 바다 밑바닥의 모래 속에 몸을 숨기고 머리 부분만 내놓은 채 먹이를 기다린다. 다섯 개의 촉각이 주위의 움직임이나 변화를 포착해 먹이가 가까이 있다고 판단되면 번개같이 튀어나가면서 순식간에 턱을 닫아 먹이를 물고 모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눈도 없고 뇌랄 것도 없는 이 동물이 그 길다란 몸을 모래 속에 숨기고 아가리 를 쩍 벌린 채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은 무시무시하다. 영어 이름이 남편의 성기를 싹둑 잘라버린 사건에서 유래한 것을 떠올려 보면 행여나 '영 좋지 않은 곳' 을 저놈에게 물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이고 의사 양반~!" 왕털갯지렁이 몸의 지름은 2cm 정도니까 실제로 잘리기까지 하지야 않겠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에 떠는 남성은 있을 법 하다. (fragile masculinity?)


2021년 1월,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린 한 논문에서는 (Pan et al., 2021) 타이완에서 발견된 신생대 마이오세의 생흔화석을 다뤘다. 2천만년 전에 살던 생물의 흔적으로, 실제 생물의 몸이 보존된 것은 아니고 매복포식자(ambush predator)였던 생물이 몸을 숨기고 있던 구멍이 화석으로 남은 것이다. 길이 2m 에 달하는 L 자 모양의 긴 구멍으로 그 입구 주위에는 깔대기 모양의 구조 흔적이 보이고 있고, 이것이 앞서 말한 왕털갯지렁이의 구멍과 유사하다는 연구결과다.

신생대 마이오세에 생흔화석을 남긴 생물의 복원도

고생물학을 공부했다고 하면 종종 "아, 인디아나 존스하고 비슷한 건가요?" 라는 질문을 받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저는 그렇게 최근의 일은 잘 모릅니다." 라고 답하곤 한다. 현생 인류가 나타난 것이 20만년 전의 일이니까 보통 고생물학자들이 다루는 수백만년에서 수억년의 시간 척도를 생각해 보면 수십만년 내지 인디아나 존스가 다뤘을 수천년의 시간대 같은 것은 좀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마이오세의 저 생흔화석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척 오래 전의 일이겠지만, 주로 수억 년 전의 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대나 중생대 화석을 다루는 학자들은 또 '아 그거 너무 최근의 일이라 잘 모르겠는데..' 라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저런 종류의 벌레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 처음 나타난 것일까? 2017년에 스웨덴과 영국, 그리고 캐나다의 연구진들이 발표한 한 논문에 따르면 (Eriksson et al., 2017) 왕털갯지렁이와 유사한 화석이 데본기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웹스테로프리온 아름스트롱기(Websteroprion armstrongi) 라는 이름이 붙은 이 화석 다모류의 턱을 보면 정말 왕털갯지렁이, 보빗 벌레와 유사한 특징을 가진 거대한 벌레가 4억년 전부터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라도 타임머신을 타고 4억년 전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다이빙은 조심!

데본기의 화석 웹스테로프리온


참고자료

https://ilyo.co.kr/?ac=article_view.. [보빗사건 25주년] “남편 ‘그것’ 말고, 왜 잘랐는지 귀 기울여 달라”

https://en.wikipedia.org/wiki/Eunice_aphroditois Bobbit worm (Eunice aphroditois)

Eriksson, M. E., Parry, L. A., & Rudkin, D. M. (2017). Earth’s oldest ‘Bobbit worm’ – gigantism in a Devonian eunicidan polychaete. Scientific Reports, 7(1), 43061. https://doi.org/10.1038/srep43061

Pan, Y.-Y., Nara, M., Löwemark, L., Miguez-Salas, O., Gunnarson, B., Iizuka, Y., Chen, T.-T., & Dashtgard, S. E. (2021). The 20-million-year old lair of an ambush-predatory worm preserved in northeast Taiwan. Scientific Reports, 11(1), 1174. https://doi.org/10.1038/s41598-020-79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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