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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플로 May 03. 2020

3. 스트레이트 스토리와 구원의 동굴

아이오와 이야기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1999 년 작품 스트레이트 스토리 (The Straight Story) 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지적 장애가 있는 딸 로즈와 함께 살고 있는 노인 앨빈 스트레이트는 어느 날 연락을 끊었던 형이 뇌졸중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는다. 앨빈 스트레이트는 죽기 전에 형과 만나 화해를 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아이오와에서 형의 집이 있는 위스컨신까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이라니, 아이오와에서 위스컨신까지라면 아무리 멀더라도 차로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여행씩이나? 노인에게는 운전 면허도, 자동차도 없었던 것이다. 딸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이트 노인은 집에서 사용하던 잔디깎이 뒤에 트레일러를 달고 트레일러에 소시지를 채워넣은 후 위스컨신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돌아가던가. 잔디깎이는 멀리 가지 않아 고장나고 만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온 스트레이트 노인은 고장난 잔디깎이를 총으로 쏴버리고 존 디어 대리점에 가서 새로운 잔디깎이를 구입한다. 그리고 다시 위스컨신으로 출발. 시속 10 킬로미터가 채 안되는 속도로 형이 사는 위스컨신 주까지 총 384 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가다가 밤이 되면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모닥불을 피우고 소시지를 구워먹는 노인 앨빈 스트레이트, 그리고 그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스트레이트 스토리다. 드넓은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가출한 젊은 여성을 만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아이오와를 횡단하는 RAGBRAI 참가자들을 만나기도 하고, 내리막길에서 제동이 되지 않아 사고가 날 뻔 하기도 한다. 잔잔한 스토리들이 진행되는 초반에, 스트레이트 노인의 잔디깎이와 트레일러가 얼핏 봐서는 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마을 하나를 가로지른다. 아이오와의 북서쪽에 위치한 웨스트벤드 (West Bend, Iowa) 라는 마을이다.


구원의 동굴이 있는 웨스트벤드를 몇 마일 남겨두고 스트레이트 노인의 잔디깎이는 고장나고 만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중에서 캡처.
새로 구입한 잔디깎이를 타고 기어이 웨스트벤드를 지나 위스컨신으로 향하는 앨빈 스트레이트.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중에서 캡처.


웨스트벤드가 위치한 아이오와의 북쪽 지역은 유난히 땅이 평평하다. 약 1만 년 전에 끝난 마지막 빙기 동안 이 지역은 두꺼운 빙하로 덮여 있었다. 빙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되면서 얼음은 녹아 없어졌고, 빙하에 실려 북쪽에서 운반되어 온 흙과 자갈, 바위 등이 그 자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즉, 빙하가 덮고 있던 자리를 지금은 빙하퇴적물이 덮고 있는데, 이 지역을 디모인 로브 (Des Moines Lobe) 라고 부른다.


빙하퇴적물로 덮여 있는 디모인 로브 지역


차를 타고 달리면 선뜻 와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 아이오와를 달려 보면 디모인 근처나 그보다 북쪽의 지형, 즉 디모인 로브 지역은 정말 지루할 정도로 평평하고, 아이오와의 나머지 지역은 크고 작은 언덕들이 계속 이어지는 지형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지평선 끝까지 언덕도 없고 계곡도 없고 그저 옥수수밭만 보이는 곳이 디모인 로브 지역이다.


끝없이 평평한 디모인 로브 지역의 전경
비교적 작은 언덕들 (rolling hills) 이 계속 이어지는 아이오와 남쪽 지역.


이런 곳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단순한 지형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뭔가 새롭고 특이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1897 년에 위스컨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 해 웨스트벤드에 부임한 가톨릭 사제 폴 도버스틴 (Fr. Paul Dobberstein) 의 심정이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도버스틴 신부는 1954 년 선종할 때까지 웨스트 벤드에서 사목을 하며 천 명 이상의 사람에게 영세를 해주었는데, 그에게는 세계 각국의 진기한 암석과 광물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학생 시절에 폐렴으로 크게 아팠던 경험이 있는 도버스틴 신부는 자신이 낫게 된다면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성지를 짓겠다고 병상에서 맹서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12 년에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매트 슈체렌스케 (Matt Szerensce) 라는 젊은이와 함께 구원의 동굴(Grotto of the Redemption)을 짓기 시작한다. 수십 년 동안 두 사람의 힘으로 동굴을 만들어 나가다가 1946 년 도버스틴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루이스 그레빙 신부 (Fr. Louis Greving) 가 도버스틴 신부의 뒤를 이어 계속 구원의 동굴을 건축했다.


도버스틴 신부의 동상.
도로 쪽에서 본 구원의 동굴.


구원의 동굴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해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를 묘사한, 가톨릭 신자라면 익숙할 "십자가의 길" 을 비롯하여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아홉 개의 조그마한 인공 동굴 (grotto), 작은 동산, 그리고 전시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란 석영 결정, 공작석, 석순을 비롯한 각종 암석 및 광물들로 표면을 장식해 놓은 구원의 동굴 건축물을 천천히 살펴보다 보면 몇 명 안 되는 사람의 힘이라도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나가면 보통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업적을 이뤄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아이오와의 외진 시골에서 다른 할 만한 일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걸 수십 년 동안 만들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는 배경으로 잠깐 지나가는 마을이지만 그곳에 이런 뒷이야기를 가진 구원의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면 앨빈 스트레이트 노인의 고집스러운 여정과 도버스틴 신부로부터 시작해 수십 년을 이어온 신앙심과 열정, 그리고 물리적인 노력이 겹쳐져 보이면서 잠시 숙연해지게 된다.


예수의 생애를 보여주는 작품들.


건축물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광물과 암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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