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로 살아보니, 그분의 마음을 더 잘 알겠어...
'역을 놓쳤다. 사람을 만났다. 진실을 깨쳤다.'
저는 버스를 잘못 탄 것도 모른 채 페북 삼매경에 빠져 한참을 가다가 강화도 해병 2사단 정문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처음 와보는 곳, '여긴 어디? 난 누구?' 더구나 캄캄한 밤에 막차를 탔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찾을 수 없었죠.
투벅투벅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곁에서 함께 걷는 동행이 생겼어요. 그분은 대리기사 아저씨였습니다. 꽤나 먼 길을 함께 해야 했기에 저희 둘은 금세 말동무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대리기사분들에겐 말 못 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분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건설업을 하다가 투자금 17억의 재산을 탕진하고 현재는 건설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답니다. 이분은 한 달에 180만 원을 벌지만 두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교육비와 식비, 월세, 4명의 가족 보험료 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대리기사를 시작했고 현재는 부업형태로 하기 때문에 월 110만 원을 벌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2시간만 자고 또 아침에 출근을 할 정도로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랗지만 버텨야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자신을 넘어지지 못하게 한답니다.
제게 무얼 하는지 물으시길래 '시민활동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냐고 묻기에 "세상이 조금씩 더 정의롭게 변하도록 만들고 싶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분은 자신 역시 오랜 시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딴 아시안게임 메달을 국가에 의해 박탈당하기 전까지...
1986년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였던 이분은 은퇴 후에 생계유지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답니다. 그러던 중 행인과 약간의 다툼이 있었고 이 일로 인해 전재산과 매년 연금은 물론 메달까지 박탈당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시작되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가난하고 앞으로도 가난할 것이라고 합니다. 부딪혀보니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고 우리가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란 걸 저보다 13년 더 살아보니 느끼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씁쓸한 대화를 마치고 나니 한 시간이 흘렀고 우린 각자의 길로 헤어졌습니다.
이 대화를 마치고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아버지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에도 아버지는 쓰러질 수 없습니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분을 하루 2시간만 자고도 버텨내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이 분의 꿈은 두 아이를 군대와 대학까지 잘 마치게 하는 것. 이것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당신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다.
두 번째는, 변화는 절망이 아닌 희망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아버지는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하면서도 자식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 자식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면 더 이상 변화가 절망이 아닌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치솟는 월세를 고정시킬 수 있고, 교육비 걱정 없이 자식을 키울 수 있으며,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고, 노력의 대가만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 변화를 꿈꿔야만 세상은 진정 변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 이런 희망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걸어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꿈이지만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됩니다."
언젠가 절망이 희망이 된 곳에서 이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