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잡은 프러포즈 D-day는 바로 내 생일이었다. 별 이유 없이 특별한 장소를 예약하면 티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교제기간은 짧았으나 몇 번 기념일을 챙기는 과정에서 그녀도 나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알고 있었기에, 생일을 맞아 분위기 있는 식당에 가고 싶다는 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의심을 피한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보수집을 통해 서울에 있는 원-테이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말 그대로 주방 외엔 손님용 테이블이 딱 한 개 있는 식당으로, 예약도 하루에 4~5 건만 받는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장소를 확정한 후엔 이벤트를 위한 영상을 준비했다. 임팩트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데 결혼하자는 말만 하면 너무 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미 결혼준비 중인데 결혼하자니, 이런 민망할 때가!). 다행히 전문적인 스킬이 없어도 그럴싸한 영상을 만들 수 있었다. 생각보다 사진과 편지 문구, 그리고 배경음으로 쓸 음악 파일만 보내주면 훌륭하게 영상으로 만들어 주는 업체들이 수두룩했다. 물론 쓸만한 사진을 고르는 것과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편지를 쓰는 노력은 나의 몫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우리의 연애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내가 꿈꿔오던 프러포즈는 사진 속 우리의 모습으로 지난 세월을 돌아볼 수 있는, 동고동락한 시간만큼 뭉클함이 느껴지는 그런 이벤트였다. 하지만 7개월은 그런 감정을 느끼기엔 조금 부족한 시간이었다. 어느 사진을 고르던 우리 모습은 큰 차이가 없었고, 특히 연애초반은 표정에서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심사숙고 끝에 잘 나온 사진들을 골라 시간순으로 배열하고, 수십 번의 퇴고를 거친 편지와 함께 영상 제작을 맡겼다. 내 노력이 허무해질 정도로 결과물은 금방 완성됐다. 조금 싼티(?)가 나긴 했지만 영상은 그런대로 봐줄만했다(내가 직접 만들었으면 퀄리티가 그 반의 반의 반도 안 됐을 테니까). 영상은 예약한 레스토랑에 보내어 식사 후 디저트 타임에 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러포즈 당일. 만반의 준비는 되었다. 차 안에 프러포즈링과 꽃다발을 실은 채(물론 여자친구의 눈엔 안 보이게) 우리는 데이트 겸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연차 휴가를 쓰고 나선 서울시내 도로가 주말과는 비교도 안되게 한산해서인지 8월 초의 찌는 듯한 더위도 다소 쾌적하게 느껴졌다. 다만, 한 가지 예상외의 변수라면, 대망의 저녁식사 전 우리가 향한 장소가 경기도 내 한 복합쇼핑몰의 실내 스포츠 놀이시설이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부터 내가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곳으로, 주말 방문을 시도해 봤으나 번번이 수많은 인파(특히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님들)에 밀려 이용을 포기했던 장소였다. 그런 나를 위해 그녀가 친히 데이트 코스를 짜놓은 점은 감사하나... 우리의 복장은 장소에 맞게 매우 캐주얼했고, 거기서 땀에 흠뻑 젖게 뛰어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나는 일생일대의 프러포즈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너무나 가고 싶다고 티를 냈던 탓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별 이유 없이 데이트 코스를 거절하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순순히, 그녀의 배려심에 매우 감동받은 연기를 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우린 신나게 오후 시간을 뛰어놀며 보냈다. 사실 기대에 비해 특별한 건 없었지만 연애 초반의 직장인 남녀가, 평일 오후 반차 휴가를 쓰고, 생일을 맞이해 근심 없이 뛰어노는데 재미없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차 안, 나는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간만의 운동으로 젖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빨갛게 상기된 볼을 한 우리의 모습은 프러포즈를 앞둔 커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야외 주차를 마치자마자 한여름에만 볼 수 있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