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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눅한과자 Mar 08. 2024

5.[일하자 편] 옆 자리에선 말로 하면 안 될까요?

 



 새해를 맞이하여 나에게 '잡일'이 하나 추가되었다. 바로 사내 체육대회 준비. 직원이 수백-수천명인 대기업이야 큰 일로 여겨질지 모르나, 이런 조그만 회사에선 참여자가 많아봐야 몇십 명 정도로 곁다리 업무나 마찬가지다. 딱히 인사발령이 있는 것도, 인력 유출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갑자기 나에게 일이 추가로 떨어진 이유는 하나. 기존 담당자가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제 50줄에 접어든 부장님께서 틈만 나면 "내가 언제까지 이런 잡일이나 해야 하나" 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걸 어쩌겠는가. 안 그래도 옆에서 준비과정을 보며 속이 터지던 터라 '내가 하고 말지'란 심정으로 일을 떠맡았다(물론 그 대가로 그분이 다른 일을 가져가진 않았다).


  체육대회라고 해봐야 이제는 서울에 있는 작은 산이나 둘레길을 다 같이 두어 시간 걷고, 저녁에 식당에 모여 회식을 하면 모든 일정이 종료되는, 조촐한 행사다. 적당히 산책 코스와 식당을 정하는 과정까지야 어느 곳이나 동일하지만 이 작은 회사는 특유의 절차가 하나 더 있다. 행사 직전 최종 참여 인원 명단을 작성하는 것이다.


  물론 회식 예약 인원수를 파악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실 식당 한 층을 통째로 빌리는 마당에 몇 명 추가되고 빠진다고 별 문제가 되랴. 그보다 중요한 목적은 임원 보고용이다. 이상하게 그 자리는 누가 앉아있든 간에 행사 참석자와 불참자를 궁금해하곤 한다. 알아서 어디서 쓰려는 진 모르지만.


  입사 초반엔 직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참석 여부를 물어보거나 단체 메일을 보냈으나, 이제는 시쳇말로 짬도 좀 찼겠(?)다, 각 부서 서무들에게 연락하여 부서원 전체의 참여 여부를 회신하라고 요청했다.

  (서무의 사전적 정의는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로, 부서 본 업무 외에도 잡다한 일을 담당하는 직원을 말한다. 통상 각 부서에서 직급이 제일 낮은, 소위 '막내'가 담당한다)


   한창 빠릿빠릿한 막내 직원들이라 그런지 조사는 금방 끝났다. 한 부서를 제외하곤. 행사 전날 아침까지 응답이 없길래 몇 달 전 입사한 그 부서 신입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00 씨? 혹시 그쪽 부서는 아직 행사 참석여부 조사 안 끝났어요?"  


   "아, 과장님. 아직 두 분이 답을 안 주셔서 기다리고 있어요. ㅁㅁ차장님이랑 xx 부장님이요."


   "부장님은 어차피 지금 뵐 일이 있어서 제가 여쭤보면 되고... 차장님 것만 취합해서 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전 내내 연락은 없었다. 살짝 짜증이 난 나는 또다시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그 차장님이 아직 출근을 안 했다는 것이다. 오전 휴가랬나, 유연근무랬나.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래, 나도 업무시간 아닐 때 연락 오면 짜증 나니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오후. 분명히 출근했을 시간인데도 여전히 답장은 없다. 세 번째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00 씨... 차장님 출근, 하셨죠?"


   "아, 네. 출근은 했는데 아직 투표에 참여를 안 하셔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응? 이건 무슨 소리람. 알고 보니 사정은 이랬다. 그 부서는 뭔가 의견을 묻거나 취합할 일이 생기면, 단체 그룹채팅방(소위 '단톡방'이라 불리는)을 만들어 거기에 투표하는 방식으로 일을 한단다. 결론은 그 '차장님'이 출근은 했으나 투표하는 걸 잊고 아직 참여를 안 했다는 것이다.


   저... 그런데 혹시 그분 바로 옆자리 아니에요? 옆인데 그냥 말로 하면 안 될까? 지금 좀 급한데.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내가 말했다.


 조사는 1분도 안되어 끝났다. 투표를 독려했는지, 아니면 직접 구두로 물어봤는지는 모른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뉴스에서나 봤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요새 한창 주목중인 'MZ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대면 접촉과 전화 통화를 최대한 피하는 대신  메시지로 용건을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학 교수님이 강의지각한 학생에게 연락해 보라고 말하자, 수강생들이 모두 '톡 보내는데요' 란 말만 하고 아무도 전화 걸지 않았다는 사례와 함께.


  물론 그녀게 별도로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대화 방식에 맞고 틀린 건 없으니까. 당장 나만해도 어제 아침에 '출근길이 밀려서 좀 늦습니다'라고 팀장님께 '톡' 드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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