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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눅한과자 Dec 12. 2023

4. [놀자 편] 택배에 네 분이나 나올 필요는 없어요

  

  



  그런 날이 있다. 괜히 일하기 싫고(물론 늘 일하기 싫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그 감정이 주변 사람에게로 전이되는 날. 신기한 건 그럴 때면 팀 동료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서로 눈이 마주치면 뭐 하나라도 핑계 삼아 수다 타임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날이 그랬다. 점심 먹고 한창 늘어지는 오후 2시, 다들 반쯤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 사마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거기 이 00님 계시나요? 택배 왔는데 직접 전해드려야 해서요."


    "네? 누구요? 그런 분 안 계시는데... 잠시만요. 팀장님, 우리 회사에 이 00 이란 사람 있어요?"


  아직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혹시라도 혼자만 모르는 이름일까 봐 주위에 도움을 구했고,


    "그거 우리 회사 전 사장님 이름인데. 무슨 일이야? 뭐? 웬 택배?"  


  대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팀장님이 대답했다. 


  "뭔데요, 뭔데요? 이 00 사장님? 그만둔 지 5년도 넘으신 분 아니에요?"


  궁금한 건 못 참는 막내가 나섰고, 그 뒤로 늘 조용하지만 이벤트가 발생하면 늘 어느새 나타나서 상황을 지켜보는 대리도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잠시 후, 우리는 택배가 오기로 한 엘리베이터를 향해 줄지어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배달원 특유의 밝은 색 조끼를 걸친 택배기사가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서류 한 장도 제대로 안 들어갈 것 같은 작은 봉투엔 영어가 잔뜩 적혀있었다. 


  "이 00님?"


  "아, 전에 계시던 사장님인데 저희가 대신 받으러 왔어요. 그런데 내용물이 뭔가요? 뭐길래 전에 다시시던 분 이름으로 왔나 싶어서."


  "음.. 이게... 인증서예요. OTP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외국 은행에서 발급받으신 거네요."

  

  뭐지. 수군수군. 우리끼리 작은 회의(?)가 열렸다. 혹시 은퇴하신 분이 배송지를 미처 안 바꿔서 회사로 개인 물품이 도착한 걸까? 아니면 그냥 우리한테 보내놓고 가져다 달라고? 혹은 배송실수나 개인정보 유출?


  어쨌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회사 주소로, 회사 사람 명의의 -비록 과거의 사람이지만- 우편물이 도착했으니 받는 수밖에. 그렇게 다 같이 모여 가볍디 가벼운 택배 하나를, 신줏단지 모시듯 호위해서 가는 우리를 본 택배기사가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택배 받을 때 한 분만 나오셔도 돼요. 네 분까지는 필요 없어요.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이에 조금 무례한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 이게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택배기사의 눈엔 우리가 얼마나 할 일없는 사람들처럼 보일까. 앞으론 한 명만 나오겠다며 멋쩍게 웃고 난 뒤 또 네 명이서 줄지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엔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만년) 부장님이 앉아있었다. 방금 전 얼마나 민망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도대체 이 꾸러미의 정체는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우릴 보더니 말했다.

 

  "어, 그거 내가 주문한 건데. 그 은행은 기관 인증서 재발급 때 대표자 명의 변경이 안 돼서 예전 사장 이름으로 그냥 했다."


  "뭐야, 그런데 옆에서 왜 애써 모른척하셨어요. 이거 가지고 넷이서 그 난리를 치고 있는데, 정작 담당자만 모른 척하고 계시고."


  "아니, 난 다들 둘러앉아 뜯어보길래 내 거 아닌 줄 알았지."


  "... "


  그날 이후, 우리는 택배가 도착하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탕비실 간식 배달이 왔을 때는 더욱 그렇다. 다 같이 벌떡 일어나 있으면 누군가가 "네 명은 많아요~"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하지만 얼마 전, 회의실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업체 사장님이 벽지 샘플을 들고 왔을 때였다. 아이보리, 핑크, 우드... 회의실에 서서 색깔을 고르던 우리는 문득 깨달았다. 택배 사건 때 자리에 앉아있던 부장님을 포함하여 5명 전원이 사무실을 비우고 왔음을. 



택배를 받는 건, 회사에서도 묘하게 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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