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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듯한호랑이 Mar 29. 2024

낮엔 공무원, 밤엔 바텐더

갈 때 가더라도 부캐 하나쯤은 괜찮잖아

2021년에 한참 부캐라는 단어가 유행을 했었다. 

부 캐릭터라는 말을 줄여서 부캐라고 한다는데 30대 중반의 우리 또래, 특히 남자들에게는 꽤 익숙한 단어다. 초등학교 때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시작으로 RPG 게임을 즐긴 보이들이라면 본캐, 부캐의 개념이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SNS에서 본인이 가진 다른 면을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어 공유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부캐를 활용한 활동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부캐란 "현실"에서 남다른 의미다. 제목에서 정의감과 신고정신이 발동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정식 공무원"이 아니다. 겸직이 불가능한 진짜 공무원이 아니고 "기간제 공무원"으로 행정 인터넷을 사용하고 공문을 다루며 공무원 보수규정을 따르지만, 겸직의 제한이 없고 공무원의 기타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일반 주민들과 민원인에게는 당연히 공무원으로 인식되고 업무도 그렇게 해석된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그 안에서도 정말 다양한 부서와 업무가 있고 특정 관심을 가져 찾아보기 전에는 해당 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공무원이라면 응당 생각나는 두 가지 키워드인 "철밥통"과 "칼퇴"는 누구나 이 직업에 대해 공유하는 단어이고 나 역시 이 부분을 몸소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아침 캐릭터는 9시까지 출근해서 오전에는 기안을 올리고 서류 작업을 하거나 출장을 신청한다. 주민들과 만나 사업을 계획, 추진하고 필요하면 컨설팅이나 교육도 한다. 업무의 여유가 있을 때는 같은 부서 동료들과 로또 이야기를 하거나 민원인의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지 회의도 하다가 12시가 땡 하면 점심시간을 가진다. 행복하고 촉박한 점심시간이 1시에 끝나면 6시 칼퇴근까지 차분하게 업무를 진행한다.

모든 일이 명분과 절차를 기반으로 진행되다 보니 정적이고 급한 변화가 적다. 일이 나 혼자 급하게 처리할 수도 없거니와 불필요한 일도 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늘 차분하게 순리대로 꼼꼼히 일을 하게 된다. 업무의 특성상 초과 근무 하는 날이 많지 않고 특히 빨간 날은 무조건 휴무다. 의미 있고 잔잔한 일과를 마치고 해가 저물 때 나는 다른 캐릭터를 불러온다.


그렇게 나는 7시부터 LP 바 바텐더가 된다.


어떻게 바텐더를 운영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일본 만화 "심야식당"의 영향이 크다.

드라마 버전을 통해 심야식당을 알게 된 사람들도 많겠지만 개인적으로 만화를 먼저 접한 입장에서 드라마는 뭔가 멋있어서(?) 거부감이 든다. 만화의 어설픈 인물 묘사와 맛깔스러운 음식 표현은 일본 여행을 갔을 때 험악한 인상의 친절한 마스터가 있는 가게를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안에 있는 상상을 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LP 바의 무드는 기본적으로 심야식당의 무드를 흉내 내려고 했다.

인테리어나 메뉴는 만화와 다르지만 공간의 분위기와 손님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장의 태도는 심야식당의 결을 따라간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음악을 공유하며 맛있는 술과 음식을 나눈다. 아침 7시에 기상해서 밤 12시에 가게 마감을 하면 잠자는 시간 6시간 정도를 제외하고 18시간씩 일만 하는 거랑 비슷한데 금, 토, 일은 주말 파트타임 직원을 고용해서 체력과 컨디션을 조정하고 있다.

 

LP바로 로망을 실현한다거나, 취미로 돈을 번다거나, 추가 수익을 창출한다거나, 다양한 목적이 있는 거 같지만 실제로는 별 목적이 없다. 그냥 적당히 만화랑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그냥 혼자만 알고 있는 재미있는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거다. 낮에 대화할 때는 마음속에 밤 캐릭터가 웃고 있다. 밤에 대화할 때는 마음속에 낮 캐릭터가 씩 웃고 있다.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하면서도 속으로 나만 알고 있는 나만의 거짓말(?)을 치는 느낌이다.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는 거짓말이지만 이때 느껴지는 일종의 희열(?)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짓게 한다.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진 못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런 나와 내 삶이 싫은 건 아니었다.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거 찾다가 직장도 직업도 여기까지 왔는데 가까운 지인들이 내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정말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롤모델이 되고 희망이 된다는 소리까지 듣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되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도 내가 왜 심야식당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땀 한 땀 만든 내 공간에서 손님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메뉴에 없는 음식과 술을 내어 드릴 때 즐거움과 비슷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해 본다. 난생처음 보는 곡을 소심하게 신청해 주는 손님에게 "와 음악 좋은데요!"라고 눈을 반짝이며 화답했던 순간. 그 손님의 감격스럽고 뿌듯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내가 왜 심야식당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는지는 알 거 같다.


그래서 행복한가? 잘 모르겠다. 언제나 즐거운 건 아니지만 나쁘지 않다.

사무실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밤에 진상 손님과 경찰서도 가고 갑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도 낮에 사무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저녁에 좋은 음악과 함께 해소하고, 밤에 진상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안정적인 월급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 은근 개꿀(?)이다. 심지어 내 삶을 부러워하면서 나처럼 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너무 부끄러워서 어깨에 담이 걸렸다.)


가끔 인생에 대해 고민인 사람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부캐 하나쯤은 나쁘지 않습니다. 평소에 뭐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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