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상인에게 "당신은 행복합니까?"를 듣다

완벽한 협상 이론과 낙타털 스카프의 진실

by 파블로

인도 여행을 시작하고, 뭔가 인도에 왔다는 느낌을 주고 싶어 기념품 가게들을 찾아다녔다. 각종 힌두교 신들의 포스터, 냉장고 마그넷, 엽서 등이 있었지만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아 그냥 골목길을 배회하였다. 그러다, 한 원단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서는 캐시미어 제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말이 기억났다. 갑자기 인도 무역상이 되는 상상의 나래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실크로드는 없어졌지만, 수십 마리의 낙타를 이끌고 저 광활한 타르 사막을 너머 내가 모은 진기한 물품들을 팔러 가는 스토리…'여기서 싼값에 소싱해서 훗날 번듯한 나의 캐라반을 만들어 캐시미어를 유통하리라...' 그러다 상점 주인과 눈이 마주쳐버렸고, 그의 강렬한 눈빛과 손짓에 나도 몰래 상점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주인아저씨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자기가 가진 원단/스카프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스카프가 필요하기는 했는데 그가 보여주는 제품들이 그다지 엄청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눈빛을 쓱 피하고 쓸만한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왠지 강제로 사야 할 것만 같았고 이 비즈니스 거래의 주도권은 내가 가져가야겠다는 마음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렇게 둘러보다가 디자인이 괜찮고 그렇게 비싸 보이지 않는 스카프를 발견했다. 그도 나의 눈빛을 읽었는지 잽싸게 그 스카프를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낙타털이 들어간 좋은 상품이고 다양한 디자인이 어쩌고 저쩌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수업에서 배운 협상법을 쓰기로 하였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스카프의 재질을 느끼며 말했다.
“흠… 만져보니까 이거 합성인 거 같은데 100% 낙타털 제품 맞나요?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디자인은 낫 베드 하네요.”
그러자 그는 100% 낙타털로 만들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당연히 합성이라고 말하였다. 그래도 디자인이 엄청 예쁘지 않냐 하면서 옆에 있는 것들도 꺼내 보여줬다. 흠… 이분 살짝 열을 올리는 걸 보니 협상의 주도권은 나에게 살짝 넘어온 것 같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스카프를 쪼물딱쪼물딱 만지면서 “낫 베드”를 연발하였다. 그도 “디스이즈 굿 프로덕!”을 외치며 응수하였다.


이제 슬슬 결전의 순간이 온 것을 느끼며 나는 살짝 심호흡을 하고 권위적인 말투로 “하우머치?”를 내뱉었다.

“1200 루피! 베리 굿 프라이스!”

여기서 덜컥 사버리면 호갱이 돼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인도길거리협상교과서에 나온 대로 반값 아래로 후려치기를 시전 하였다.

“500루피!”
그러자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고 말하였다. 나는 바로 그 다음 행동강령을 실행하였다. 몸을 돌려 가게 밖을 나가려고 하자 그는 “1000 루피!”를 외쳤다. 여전히 비싼 거 같아 그를 노려보며 “600루피!”를 외쳤고 그 또한 나를 노려보며 “800루피!”를 외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여기서 그냥 나가서 다른 가게로 갈까 싶었지만, 살짝 피곤한 상태였고, 다른 가게 가서 또 이 쑈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인배가 되어 한 발자국 양보하고 스카프를 사기로 결심했다.

“700루피!”


그는 마지못해 판다는 표정으로 알았다고 하였고 스카프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 되었든 협상에서 큰 이득을 봤다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스카프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물건의 가격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행복하면 된 거라고,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의 철학강의에 살짝 당황했다. 물론 스카프를 합리적인 가격에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내가 괜히 힘들게 장사하는 사람 괴롭힌 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그리고 과연 이 비즈니스 거래에서 승자가 된다는 게 진짜 행복한 것인가라는 질문도 올라왔다. 아무튼, 협상에서 이겼다는 우월감과 진정한 행복에 대한 철학적 고뇌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걷다 보니, 목에 두른 700루피짜리 낙타털(이라 주장하는 합성) 스카프에서 묘한 화공약품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숙소 주인에게 이 스카프를 보여주니 자기가 아는 가게에서 300 루피면 구매가능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IMG_1604.HEIC


이전 02화아마추어 인류학자의 첫날밤: 피로와 사기의 상관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