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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하는 이모씨 May 26. 2023

무명無名감독 아니구요, 다명多名감독입니다.

오늘도 나는 당당히 영화인으로 산다. 

초등학교 동창모임에 나갔다. 

이런저런 근황토크가 이어지다가 문득 한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너는 요즘 뭐 해? 영화 안 해?"

이렇게 적고 보니 그 친구가 맥이려고 저러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 친구의 물음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따뜻한 걱정이 그득했다. 

그 마음을 알아 답을 하려는데 다른 친구의 언성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야!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우리도 다 궁금한데 못 물어보고 있잖아. 부담 주지 말고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

이렇게 적고 보니 이 친구가 나를 살펴주는 것 같지만 실상 나는 씨게 한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명 감독인 건 확실하구나 싶었다. 

"요즘 뭐 해?"

이 질문이 뭐 얼마나 대단한 질문이라고 낄낄대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정작 나는 한마디도 안 했지만 이 분위기에 상당한 지분을 느꼈고 책임감을 가지고 녹여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나 영화해~. 그만하면 내가 먼저 말할게~하하하"


그렇다. 나는 무명감독이다.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작품은 이미 개봉한 지 수년이 지났고 네이버프로필은 19년 시나리오피칭 수상에서 멈춰있다. 그러니 친구들의 걱정은 당연하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생각처럼 그렇게 구겨져 있지 않다. 

검색창은 증명하지 못하는 나의 무수히 많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1. AKA 감독

사람들이 나를 알던 모르던 나는 감독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내가 감독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무수히 많은 실패를 하고 있게 때문에 프로필이 비어있을지언정 나는 무수히 실패하기 위해 무~~~ 수~~~ 히 많은 도전을 지금도 정말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실은 나와 내 노트북, 함께하는 대표님 정도만 아는, 지킬 필요는 없으나 아무도 발설하지 않는 비밀일 뿐이다. 


2. AKA 엄마

나는 두 딸의 엄마다. 큰애는 나보다 10cm 정도 큰 중3이고 둘째는 나랑 똑 닮은 초5의 사춘기 어딘가에 발하나를 걸치고 있는 아이다. 

딸들이라 손 갈 일 없겠다는 말을 진짜 많이 들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도 살갑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고 싶어 엄마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 딸들이라 좋겠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품이 덜 드는 대신 맘이 든다. 살가운 대신 살이 찔 틈 없이 엄마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어 한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라고 투덜대지만 다른 것에 상당히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거 보면 얘네들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3.AKA 아내

연애 3년 결혼한 지 18년, 도합 21년을 만난 남자의 아내다. 

그 남자는 21년 동안 한 번도 어제보다 오늘 나를 덜 사랑한다고 느끼게 해 준 적이 없고 그 어떤 순간에도 나의 인격을 건드린 적이 없다. 작업한답시고 내 방에 처박혀 유튜브를 보며 킬킬대는 순간에도 엄마는 이 모든 것이 작업이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주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결혼하고 애까지 키우면서 감독이 된 것을 무슨 훈장처럼 치켜세워주지만 사실 나는 아내가 안되었다면 엄마가 될 일도 없었을 테고 기어이 감독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아내라는 이름은 지금 내가 가진 이름 대부분의 시작이고 귀결이다. 


4. AKA 딸

이걸 쓸까 말까 엄청 고민했지만 이것조차도 나의 역할이니 쓰기로 한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딸이다. 

어릴 적, 사이가 지독히도 안 좋으셨던 두 분 사이에서 공포스러운 유년기를 보냈다. 주먹이 날아다니고 찢어진 옷가지가 널브러진 집안을 나는 영화에서보다 먼저 봤다. 

그 과정에서 아빠 욕을 하는 엄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아빠와 친해질 기회를 놓쳤고 그런 나는 아빠와 20년을 넘게 대적하며 엄마대타로 싸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흔 넘은 딸과 싸우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엄마아빠에게 나는 가장 큰 자랑이고 착한 사위와 예쁜 손녀들을 데려온 의인이며 가장 만만한 심부름꾼이다.  


5. AKA 교수라고 불리는 강사

나는 자타공인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교에서 시나리오를 가르치고 있다. 

동시에 연기지망생들이 선호하는 top3안에 드는 대학의 연기과에서 카메라연기도 가르친다. 

뭐 대단해 보이지만 강사이기 때문에 매년 재임용갱신을 해야 하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이 정말로 좋다. 

교수라는 호칭에 허세를 떤 순간도 분명 있을 테니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유치원 다닐 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학교수라고 대답하던 쪽방 사는 코찔찔이가 보란 듯이 이뤄냈다는 성취감 때문일 수도 있다. 고3시절 내가 똑 떨어진 두 대학에 20년여 년만에 교수강사로 돌아갔다는 성공스토리를 갖게 돼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진짜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건 학생들의 눈이 검색창은 증명하지 못하는 나의 시간을 증명해 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체능이 그렇겠지만 영화라는 과목은 다른 학문과 달리 교수의 역량이 곧 수업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업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느낀 대로 반응한다. 그러니 교실은 살아있는 댓들창이 따로 없다.

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눈에서 내가 보낸  무수히 많은 도전을 확인한다. 

내 수업을 귀하게 여겨주는 마음이 위로가 된다. 내 실패가 이 수업을 통해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6. AKA 이모

나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00(큰 아이이름)이 이모로 불린다. 

거기에서 나는 감독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니 무장해체가 되고 만다. 

세수도 안 하고 모자만 눌러쓰고 찾아가 이웃집 소파에 누워있기도 하고 평범한 반찬에 밥을 얻어먹으며 역시 남이 해 준 밥이 최고로 맛있다는 아줌마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갬성을 나누기도 한다.  

때론 대출 걱정에 아이들 학교문제로 수다를 떨며 놀이터에 한구석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척 수다삼매경에 빠진다.



이것 봐라! 나는 무명감독이 아니다. 

영화감독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아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든, 내가 경험한 걸 풀어낼 때 말하는 '이야기‘이든 나라는 사람을 투과하여 영화적 변주를 더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그런데 내가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 놓는데 실패한 것뿐인데 여전히 무명감독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이름이 많은데 감히 나의 이 무수한 이름들까지 싹 다 없는 셈 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반복되는 실패를 하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야기'에 도전하고 있다. 

그 도전의 여정 위에서 나는 이야기는 주인공에서 출발하며 끝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주인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난다는 것도. 


이제부터 이곳에 내가'이야기'를 만나는 여정을 담아보려 한다. 

이건 실패의 기록이 아니다. 아무도 모를 뿐, 매일 성실히 '이야기'와 마주하며 터득한 성공의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확신한다. 

때론 영화하는 아줌마로, 아줌마 하는 교수로, 엄마 하는 영화감독으로 그렇게 이야기와 만나는 과정을 함께하다 보면 당신도 스토리 한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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