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현장
서문에 쓴 것처럼 현장에서 연출부로 일하며 시나리오가 있는지, 좀 써놓은 거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안 받아본 사람은 없다.
만약 연출부로 일했는데 이런 경험이 없다면 그건 안타깝지만 오래 영화할 사람으로 안 봤다는 말이다.
현장은 진짜 별의 별사람들이 다 모인다.
그중 나의 사고방식에 전복적인 영향을 준 한 사람이 있다.
내가 연출부시절 사운드 기사님 이야기다.
당시는 촬영시간제한이 없어 말 그대로 감독님이 끝내야 끝날 때였다.
그러니 세트촬영의 경우 20시간 촬영을 이어가는 것은 우수운 일이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잠이 부족한 상태로 촬영을 하니 모두 신경이 예민할 수밖에.
그런데 슛이 들어가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데 화면 위에서 까만 마이크가 쓱 내려왔다. 붐마이크를 드는 기사가 졸면서 팔에 힘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모니터를 보던 나는 감독님께 알렸고 감독님은 급히 컷을 외쳤다. 아니, 정확히는 컷'이라고 외치는 대신 '붐'이라고 외졌다.
순간 아주 작은 원망 섞인 한숨 100개가 세트장에 동시에 울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운드기사님이 붐마이크 기사님께 정말 쌍욕을 쏟아내셨다.
목소리도 얼마나 우렁차고 정확한지 100명의 귀에 정확히 들렸다.
그러자 다음 반응이 어땠을까?
모든 스텝들이 모두 사운드기사님께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러냐고 한 마디씩 했다. 붐마이크 기사님께는 한마디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우린 모두가 알아차렸다.
사운드기사님이 자기 식구를 지키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이도 어린 붐마이크 기사님이 혹시라도 사람들의 원망을 받을까 봐 모든 총알을 대신 맞기로 하신 거였다는 걸. 원망대신 힘들지?라는 위로를 듣게 하시고 괜찮다는 격려를 듣게 하신 거라는 걸 말이다.
실제로 곧바로 이어진 식사시간에 모든 면박은 사운드기사님이 받고 그 앞에서 같이 밥먹듼 붐기사님은 우리 기사님 그만 타박하라고 웃으며 말리셨다.
요즘에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누군가 사운드기사님을 신고했을지도 모르겠다. 팀원 학대나 모욕을 언급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땐 이런 일도 있었다.
글로만 존재하던 세상이 살아나는 일도 멋지지만 그만큼이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현장이다.